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경규가 쓴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을 읽었다. ‘이건 희극인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농담’이라고 칭할 수 있는 여유, 게다가 ‘완벽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기세라니! 청회색 하늘 위로 선명하게 박힌 활자엔 군더더기가 없다. 고점과 저점의 롤러코스터로 커브를 돌며 날아가는 인생, 수시로 맨홀에 빠져 ‘나락 갈’ 것 같은 현란한 리얼리티 무대에서 이경규는 45년째 생존 중이다. 웃음보다 비웃음이 더 많은 세상에서 우리 안의 심약한 본심, 응큼한 속내가 드러나도록 산뜻하게 호...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는 권총 한 자루로 세계사적 야만성에 맞서는 안중근의 ‘대의’보다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하얼빈으로 향하던 한 사내의 구체적 몸이 그려진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우민호의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대한의군의 참모 중장이며, 먼저 간 동지들의 목숨값을 치르기 위해 살아서 하얼빈 역사에 당도한 큰 정신의 군인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 러시아 군인들 틈새로 조준선을 열었다. 그의 품속에 있던 실탄 일곱 발이 출력되...
‘완벽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는 뉴욕 목수의 이야기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과 글쓰기의 핵심을 꿰뚫는 흥미로운 통찰이 많아, 서가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았다. 프롤로그 ‘불길한 시작’부터 온갖 파란만장한 사건이 인생 전반에 속출한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둘 곳이 없어 대학 기숙사 서랍 아래 칸에 뉘고 키웠다(하긴 예수도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첫 직업이 목수였다). 늦은 나이에 네 아이를 키우며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어머니는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만, 마크 엘리슨은 고교 중퇴 후 수천 개의...
어린 시절 나는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아메바처럼 배열된 의미 없는 반복 문양을 바라보며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리길 바랐다.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거리를 배회하거나, 가로등 아래서 소꿉놀이하며 청승맞은 가요를 부르곤 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소속 신호’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어졌다. 온전히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열망은 인정 강박을 낳았지만, 성취를 이뤄도 ‘자격이 없다’는 내면의 메시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나, 스스로에 대한 긍정 감정은 바닥을 ...
#상황1 돌아오는 표는 없다 “119죠? 제가 치명적인 독극물을 삼켰는데요. 이젠 죽고 싶지 않아져서 빨리 좀 도와주세요. 제발!”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어디에 계시죠?” “집이요. 인터넷으로 약물을 주문했어요. 확실히 죽는대서.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제기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세르코딘을 삼키셨다고요?” “네. 3분 전에 삼켰고, 지금 당장 해독제를 먹으면 살 수 있대요. 더는 죽고 싶지 않아요. (흐느끼며)벌써 몸에 약효가 도는 게 느껴져요.” “구급차를 보낼게요.” “빨리요. 전 겨우 스물세...
생각해 보면 IMF와 닷컴 버블 이후로 경제는 늘 불황이었다. 내가 속한 미디어, 출판업계 사람들은 해마다 ‘사상 최악의’ 불경기라고 근심을 쏟아냈다. 코로나 이후 시장 사이즈는 점점 작아지는 데, AI 신기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서 노동시장은 매일 흥분과 불안으로 출렁인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침체의 늪은 언제 끝날 것인가? 그 끝의 시작은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풍요의 모델이었던 미국은 어떻게 될까? 한국 정치의 앞날에도 봄은 찾아올까? 지난 6월 나는 변동성이 커질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라고 한 ...
코로나가 한창이던 4년 전 봄, 나는 ‘내 아이를 위한 감정 코칭’의 저자이자 감정 코칭 전문가인 최성애 박사를 인터뷰했었다. 마스크를 쓰고 온라인 수업을 받으며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아이와 양육자를 위한 인터뷰 기사의 발문은 다음과 같았다. ‘연결하라, 감정에…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것처럼’ ‘좌충우돌 10대는 전두엽 리모델링 중… 공사 잘해야 뇌 평수 확장’ 교실은 수많은 감정적 정보가 오가는 정거장이며, 아이들은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 교사보다 또래 집단에서 더 많은 질서와 규칙을 배운다. 싸우거나 협...
도쿄의대 노년내과 의사 가마타 미노루 선생이 쓴 책 ‘적당히 잊어버려도 좋은 나이입니다’를 읽었다. 인생 후반을 위한 현실적 생활 조언이 가득해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릎을 쳤다. 몇 년 전 인터뷰 했던 니시나카 쓰토무 변호사의 ‘운을 읽는 변호사’의 두 번째 버전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만 명의 의뢰인의 삶을 분석한 노 변호사가 ‘운의 좋고 나쁨은 도덕성이 결정한다’고 발견했듯이, 50년간 환자의 뱃속을 들여다본 75세 노 의사는 ‘몸과 마음의 건강은 근육의 힘과 망각 능력에 달려 있다’고 차근차근 증...
“인간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 속에서 지냅니다. 방황이 상수인 삶,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김기석의 ‘고백의 언어들’ 중에서. 오랫동안 우리 시대의 설교자 김기석의 언어들을 찾아다녔다. 신학과 인문학을 경계없이 아우르는 그의 강연은 우리를 멈춰 서게 한다. 처음엔 다정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으로. 그다음엔 인간의 영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잇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증명으로.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웃는 입에서 개울처럼 졸졸 흘러나오는 그의 언어는, 세상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
“오늘날 우리가 삶에서 만들어내는 열은 어딘가에 가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열은 세상 모든 것에 가닿는다.’-제프 구델의 ‘폭염 살인’ 중에서. 우리는 화염을 들이마시는 것 같은 뜨거운 세계에 들어섰다.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국은 열대야로 몸살을 앓았다. 기록에 의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지금껏 겪은 것 중 가장 뜨거운 한 해는 2023년이었다. 뉴욕에서는 더위에서 발화한 캐나다 산불 연기 때문에 하늘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오렌지색으로 물들었고, 플로리다키스제도에서는 물고기들이 수온 38.5도로 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뜨개질하거나 자전거를 탈 때 큰 행복감을 느꼈다. 긴 대바늘에 실을 감고 코를 빼는 단순한 손동작만으로 세상에 없던 포근한 면적이 만들어지고, 두 발을 페달에 얹어 돌리는 동작만으로 바퀴를 굴려 저 멀리 나아갔다 돌아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크게 머리 쓰지 않아도 눈앞에서 확실한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작업은 근심 없는 몰두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멍때리기도 다르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장작불이나 논두렁, 강물이나 구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라보는 것만으로 얽히고설킨 디지털 실타...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을 읽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23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전혀 새롭지 않았으나 엄청난 흡인력으로 읽혔다. 예컨대 ‘겪어봐야 안다’ ‘행복의 1원칙은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다’ ‘모든 여정은 원래 힘들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확실성이다’ 등등 우리가 어렴풋이 아는 일상의 진리를 짧고 강렬한 이야기로 재배치해서 뇌에 ‘꽂아주는’ 쾌감이 대단했다. 모건 하우절은 급변하는 기술 사회와 불안정한 주식 시장, 그럼에도 36억 년간 이어진 진화의 방향...
지난 4월 벚꽃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날, 진은숙을 만났다. 출렁이는 흑발, 검은 마스카라가 번진 눈매, 드넓은 광대뼈…. 이국적인 여성이 낙화를 뒤로 한 채 호텔 로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울시향 황금기 시절(정명훈이 예술감독으로, 진은숙 상임 작곡가로 일하던 꿈같은 시절)에 처음 만났으니, 7년 만의 해후다.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라는 대작을 정명훈 지휘로 한국 초연하고, 영국 로열 오페라단을 위해 ‘거울 속의 앨리스’를 쓰던 50대의 진은숙도 웅장했는데, 60대의 그는 더 멀리 나아갔다. 올해 1월 독일 에...
모든 물질에는 에너지가 고여 있다. 지구가 고열에 시달리지 않도록 수소는 잘 빼내고 탄소는 잘 묻는 것이, 환경공학자들의 일이다. 인생도 그렇다. 의미 있는 시간을 살기 위해 꿈의 불씨는 키우고 스트레스는 잘 묻는 것이 모든 개인의 바람이다. 결국은 에너지 싸움이다. 인생도 경제도. 지치지 않고 오래 이어지는 삶, 지속가능성에 특별한 해법이 있을까. 작년 9월 한국인 여성 최초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공과대학 학장으로 부임한 화학공학자 박아형은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소통’에서 찾았다. “...
어렸을 때 나는 ‘거미 소녀’가 되고 싶었다. 장터 서커스단 천막에서 로프를 타고 가뿐히 위로 솟아오르던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거미 소녀.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우아한 팔과 다리를 뻗어 세상 어디로든 점프하며 살기를 꿈꾸던 ‘거미 소녀’의 환상은, 그러나 ‘스파이더맨’의 낡은 여성 버전으로 유년의 창고에 처박혔다. 누구나 다른 자아, 다른 삶을 꿈꾼다. 격무에 시달리다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처럼, 의미 없는 버둥거림으로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는 ‘자기혐오’에 괴로워하다가도, 어딘가 ...
“LA카운티에서 일하시는 유명한 정신과의사가 사람에게 중요한 3가지 P가 있다고 했어요. Place, Person, Purpose. 장소, 사람, 삶에 대한 목적. 3P 중 정신 자원에 가장 중요한 건 삶에 대한 목적이 아닌가 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면, 저도 우울할 거예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가 따스한 눈빛과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2019년 세계은행 총재직을 사임한 뒤 저소득국가를 위한 인프라 투자와 정신 건강 개선에 전념하고 있던 김용 전 총재가 한국을 찾았다...
체스는 천재들의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럴까? 1991년 봄, 미국 전역의 천재가 모인 중등학교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창단 2년 된 할렘 빈민가 출신의 공립학교 체스팀이 부유한 명문 사립학교 출신의 고도로 훈련된 체스팀을 이긴 것이다. 대부분 유색인종에 한 부모 가정 출신의 빈민가 아이들이 어떻게 신동들로 가득 찬 전통 있는 엘리트 백인 체스팀들을 이길 수 있었을까? 비밀은 공립학교 체스팀 코치 애슐리의 전략에 있었다. 애슐리는 체스팀을 꾸릴 때 실력이 우수한 아이보다 감정을 스스...
여기 1년간 마트를 끊고 사계절을 오로지 수렵과 채집만으로 생활을 꾸린 실험가가 있다. 영국의 채취인 모니카 와일드는 코로나 기간에 1년간의 수렵 채집을 계획하고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사계절을 야생식으로만 ‘버텼다’. 아니 ‘버텼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그가 먹고 뜯고 산책하며 보낸 365일의 기록 ‘야생의 식탁’을 보면, 책갈피마다 군침이 절로 돈다. 어수리 튀김, 꾀꼬리버섯을 곁들인 훈제 고등어, 훈연한 바닷소금, 산사나무 열매 셰리주, 석잠풀 덩이뿌리 찜, 쐐기풀잎 칩, 구운 야생 사과… 자연에 먹을...
“하이먼 박사는 노화에 관한 최신 연구 ‘영포에버’로 생물학적 나이를 되돌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비법은 분명하고 실행하기 쉬워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구글 전 CEO 에릭 슈밋 새해가 밝았고 우리는 한 살 더 먹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나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쇠퇴와 질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보통 사람이 마지막 20퍼센트의 시간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보낸다고 추정한다. 76세까지 산다면 60세부터 이미 죽어간다는 뜻이다. 따져보...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신경 끄기의 기술’에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마크 맨슨을 봤을 때, 나는 그가 배우 매튜 매커너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회고록 ‘그린라이트’의 저자이기도 한 매튜 매커너히는 글도 연기처럼 엄청난 하이 상태에서 쓴 것 같았다. ‘똥을 밟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온 세상이 공모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매커니히는 회고록에서 기술했다. 마크 맨슨의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당신이 어딜 가든 똥 덩어리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 중 기꺼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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