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 업종이나 특정 테마가 아니라 단순히 개인 투자자가 많이 산 미국 주식을 편입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결국 개미가 이겼다”며 투자자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전문 투자 집단으로서 운용사의 존재감이 없어졌다”는 자조가 나온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업과 업종을 분석해야 할 펀드매니저가 거꾸로 개인의 투자 흐름에 편승해 쏠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서학개미(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가 대거 사들인 테슬라,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주가가 급등하면서 삼성자산운용의 ‘KODEX 미국서학개미’ ETF와 한국투자신탁운용의 ‘ACE 미국주식베스트셀러’는 연간 수익률이 100%에 육박했다.
지난해 초 9600원에 거래되던 ‘KODEX 미국서학개미’ ETF는 현재 2만원에 육박한다. ‘ACE 미국주식베스트셀러’ ETF도 마찬가지로 지난해 초 100만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투자금은 200만원으로 불어났다.
두 상품의 특성은 서학개미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따른다는 것이다. ‘ACE 미국주식베스트셀러’ ETF가 추종하는 지수는 ‘에프앤가이드(FnGuide) 미국 주식 베스트셀러 지수’다. 국내 투자자가 많이 투자(매수·거래·보유)한 미국 상장사 중 기업 규모와 재무상태를 고려해 종목을 편입한다.
삼성의 ‘KODEX 미국서학개미’ ETF는 더 노골적으로 서학개미를 추종한다. 이 ETF는 NH투자증권(005940)의 ‘iSelect 서학개미 지수’를 추종하는데 이 지수는 미국 뉴욕거래소와 나스닥거래소에 상장된 종목 중 예탁결제원 보관금액 상위 25개 종목을 골라낸 지수다.
서학개미들이 많이 보유한 종목을 그때그때 추종한다. 테슬라, 엔비디아, 애플 등 빅테크뿐 아니라 ‘양자컴퓨터’ 관련주로 알려져 단기간 투자 자금이 몰린 아이온큐, 리게티컴퓨팅 등 중소형주도 담고 있다. 지수에 포함된 양자컴퓨터 테마주가 정말 투자할 가치가 있는 기업인지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이들 운용사는 해당 ETF에 대해 “집단지성의 힘을 활용한 투자 상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동안 투자 성과를 보면 집단지성을 활용한 투자 전략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 주식이 더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만큼 이들 ETF는 앞으로 더 많은 자금을 끌어모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해당 ETF의 선전을 바라보는 업계에서는 씁쓸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자산운용사의 역할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참신한 투자 상품을 제공하는 것인데, 거꾸로 개인이 많이 투자한 종목을 담는 ETF를 내놓았다”며 “다양한 투자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해당 ETF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펀드매니저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한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의 포트폴리오를 쫓는 ETF가 투자 쏠림을 심화시키고 조정 시 손실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당장은 수익률이 높지만, 서학개미가 많이 투자한 종목이 본격적인 조정을 받을 때 해당 ETF가 얼마나 선방하느냐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