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김모씨는 지난달 말 서울 소재 아파트 전세 계약을 맺은 뒤 최근 주거래은행에 전세자금대출을 문의했으나 ‘대출이 불가하다’며 거절당했다. 전셋집에 집주인이 받은 주택담보대출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세 계약을 체결할 때까지만 해도 부동산 중개업자는 은행이 규제를 완화하는 추세라 대출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다급해진 김씨는 집주인과 상의 후 ‘임대인은 잔금일에 받은 전세금 일체로 주담대를 갚는다’는 내용의 선순위 채권 말소 조건을 특약으로 넣어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지만, 대출은 또다시 거절됐다.
금융 당국이 가계대출 관리에 고삐를 조이자 대출 문턱이 다시 높아지며 실수요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정부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확대 재지정한 후 갑자기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대출을 받기 어렵게 되자, 김씨와 같이 이사를 계획하던 금융 소비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 27일부터 서울 지역 조건부 전세자금대출 신규 취급을 중단했다. 선순위 채권 말소·감액, 다주택자의 기존 주택 처분 등 조건부 전세대출 등이 해당한다. 5대 시중은행 중 서울 지역 조건부 전세대출을 유일하게 허용하던 하나은행마저 문턱을 높인 것이다. 현재 선순위 채권 말소·감액 조건부 전세대출이 가능한 은행은 신한은행뿐이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8월부터 조건부 전세대출을 모두 막았으나, 선순위 채권 말소·감액 조건부 전세대출은 올해 1월 재개했다.
은행들이 일제히 조건부 전세대출 규제를 강화한 것은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를 막기 위함이다. 금융 당국은 은행에 ‘선순위 전세대출이 설정된 주택에 후순위로 주담대를 취급하는 경우’ 대출이 적정하게 취급됐는지 집중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은 예컨대 7억원 전세가 낀 시가 16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살 때 은행에서 4억원정도의 주담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 유형은 실거주가 목적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대출 취급을 중단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김씨와 같은 경우다. 주담대 등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된 주택엔 실거주 목적이라 해도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받기 어려워졌다. 은행 관계자는 “대출 끼고 산 집을 전세로 놓고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주담대를 갚은 뒤, 다시 대출을 일으켜 추가로 주택을 구매하는 투기 수요가 상당해 이를 막기 위한 목적이다”라며 “실거주 목적의 전세입자가 집을 더 구하기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라고 했다.
금융 당국은 은행 책임만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26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은행의 ‘대출 심사’가 중요하다며 “투기적 수요를 걸러내 실제 대출이 꼭 필요한 이들에겐 우선순위를 줘야 한다”고 했다. 은행이 투기 수요는 걸러내되, 실수요자는 불편이 없도록 면밀하게 심사해 대출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은행들과 선제적으로 협의하며 가계대출을 점검하겠다”고 했다.
실수요자 피해 우려에도 은행들은 당분간 대출 문턱을 낮추긴 어려운 분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은행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을 세분화해 은행별로 주담대 및 전세대출 증가 추이를 꼼꼼하게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수도권 지역 실수요 목적의 신규 가계대출 취급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