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성 국제부장

몇 년 전 세계적인 통화·금융 전문가인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를 인터뷰하면서 한국 경제를 위한 조언을 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중(美中)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하면서 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앞날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그리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교역 상대국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이어졌다. "한국의 교육이 시험을 위한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

예일대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자문위원을 지낸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UC버클리 한국학 연구소의 전임교수를 겸하고 있으며, 1987년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를 다룬 책 ‘한국 경제: 기적의 역사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로’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 경제의 미래는 교육개혁에 달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니 가볍게 넘겨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한 교육개혁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간한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한국이 브라질을 제치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에 등극했다고 발표했다.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덜 못해서' 얻은 결과지만 의미가 없진 않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명을 동시에 갖춘 국가를 의미하는 '30-50 클럽'에 가입한 7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머지 6개국(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의 면면을 보면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분단의 비극을 딛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라는 만만치 않은 이웃에 시달리며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경제 분야 이외의 글로벌 지표를 살펴보면 ‘선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지난해 통계개발원 발표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 한국 아동·청소년의 행복도 평균은 10점 만점에 6.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터키(6.6점)와 함께 최하위권을 차지했다. 11·13·15세 연령대의 삶의 만족도 평균을 산출해 구한 수치다. 한국을 제외한 OECD 국가 평균은 7.6점이었다. 한국 학생들의 학업 수준은 국제적으로 최상위권이지만 학업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는 모두 평균 이하였다.

얼마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020 아동·청소년 인권실태조사’ 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지난 1년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한 중고생은 응답자의 27%에 달했다. ▲학업부담, 성적 등 학업문제 39.8% ▲미래(진로)에 대한 불안 25.5% ▲가족 간의 갈등 16% 등이 이유였다.

미래 주역들이 이렇듯 고통에 시달리는데 국가 경제의 앞날이 밝길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은 0.8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부모 세대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도 행복지수가 오히려 낮아지는 역설은 다각도로 모색할 수 있겠지만, ‘쏠림 현상’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뜬다 싶으면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한국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하다는 이야기다. 아이켄그린 교수가 걱정한 교육 분야로 좁하면 희망 학과나 직업에서도 이같은 쏠림은 두드러진다.

의사건 변호사건, 연예인, 유튜버건 특정 직업이 안정적이거나 유망하다고 해서 그쪽으로 한줄서기가 심해지면 다수가 불행해진다. 확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정된 재화나 서비스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좌절하는 이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전공이나 직업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쏠림 현상은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도 좋을 리 없다. 진정한 선진경제의 길로 들어서려면 다양한 분야의 인재 수급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제대로 만개(滿開)하려면 생명과학이나 코딩은 물론 제조업과 엔지니어링 기반도 튼튼해야 한다. 첨단기술 시대에 돌입했다고 농업의 위상이 낮아질 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후 변화와 물 부족,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경작지 감소, 인구 고령화 등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 자녀들은 평생을 ‘공부하며’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고, ‘괜찮은’ 직장에 취업했다고 해서 보장되는 건 이제 많지 않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유리한 출발선상에 섰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녀가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분야를 택하는 게 행복지수와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행여 ‘제2의 김연아'가 될 수도 있는 재목을 못 알아보고 시험 성적만으로 다그친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 “한국은 모두가 한곳에서 1·2등 하려고 경쟁”

3년 전 중국 출장 중 묵었던 광저우 호텔의 영업팀장은 한국의 한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그에게 한국과 중국 젊은이들의 차이를 물었더니 "중국에는 ‘네가 거기서 1등 하면 나는 여기서 1등 하겠다’는 식으로 조화를 중요시하는 문화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모두가 한곳에서 1·2등 하려고 경쟁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와 교육 시스템이 비슷한 일본은 오랜 시간 한 우물을 판 장인을 존중하는 전통의 뿌리가 깊다. 그래서 오래된 노포(老舗) 옆에 같은 업종 점포가 문을 여는 건 상도덕(商道徳)에 어긋나는 행위로 지탄을 받는다.

우리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재능과 열정을 진로와 매칭시키기 위한 교육이 중요해 보이지만 이 부분에서 대한민국 공교육은 존재감이 크지 않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모들의 생각도 바뀔 필요가 있다. 실패를 통해 배운다면 그건 성공에 이르는 과정일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가 조바심을 벗어버려야 자녀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자존감이 높으면 외부 상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간다. 그래야 행복지수도 올라가고 종국에는 목표한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늘어난다. 행복한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출산율도 높아지고, 국가 경제의 ‘회복탄력성’도 커진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으로 등골 휘는 가계 경제를 위해서도) ‘교육 혁신’을 고민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