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 인수가 또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이번엔 영국 정부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내세워 해당 인수 조사에 나섰다.
엔비디아는 현재 중국이란 걸림돌과 씨름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인수 불허를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에는 ARM차이나가 ARM 본사와 지배권 다툼 이후 독립 경영까지 선언한 상태다.
19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리버 다우든 영국 디지털·문화·미디어·체육부 장관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영국 기술 산업의 번영을 지원하고 외국의 투자를 환영하고 싶다. 그러나 이번 거래의 경우, 국가안보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다우든 장관은 이에 따라 영국 반(反)독점 당국인 경쟁시장청(CMA)에 오는 7월 30일까지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9월 일본 소프트뱅크로부터 ARM을 400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인텔, AMD처럼 중앙처리장치(CPU)를 생산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엔비디아는 지난 12일에도 ARM 코어 기반으로 설계한 데이터센터용 CPU ‘그레이스’를 공개하며 ARM 인수 이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실제로 당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제 우리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처리장치(DPU)에 이어 CPU까지 3종류의 칩을 가진 기업"이라고 선언하며 스위스 국립 슈퍼컴퓨팅 센터와 미국 에너지부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등에 그레이스를 선제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CMA의 보고서를 이유로 ARM 인수를 거부할 경우, 엔비디아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영국 정부가 CMA에 추가 조사를 요구할 시에도 차기 제품 생산 지연에 따른 일정 수준의 손실은 불가피하다.
현 시점에서는 긍정적인 전망보다 부정적인 전망이 많다. 최근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사태로 각국 정부가 이 산업의 중요성을 새삼 눈치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CMA가 이미 엔비디아의 반독점 위반 여부를 조사중인데도 영국 정부가 국가안보 문제를 꺼내든건 사실상 ‘우리 기술을 넘겨줄 수 없다’는 의지 표현이란 해석이 나온다.
엔비디아가 ARM의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비록 엔비디아가 지금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ARM 본사 이전이 엔비디아 측에 더 이득인 만큼 각국의 인수 승인을 받은 뒤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인텔, AMD 등 경쟁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GPU와 쿠다(CUDA) 플랫폼으로 딥러닝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스마트폰과 IoT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ARM을 품으면 대규모 데이터 처리를 위한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이들의 지위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출시 당일 엔비디아(5.62% 상승)와 인텔(4.18% 하락)의 주가가 반비례했다는 점만 놓고 봐도 이같은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다.
사실 경쟁사 입장에서는 엔비디아가 ARM과 협업만 한다고 해도 불안하다. ARM 아키텍처는 인텔, AMD 아키텍처의 대항마로 꼽히기 때문이다. 아키텍처는 일반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의 하드웨어 구조나 기능적 구성 방식을 의미한다. 프로세서, 레지스터, 기억장치, 입·출력 장치 등 하드웨어 구성 요소의 전반적인 기계 구조와 설계 방법을 포함한다.
웹 트래픽 분석·통계 서비스업체 스탯카운터와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스마트폰 시장 대부분을 차지한 애플과 안드로이드 기기 90% 이상이 ARM의 아키텍처를 적용한 저전력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은 아예 ARM 아키텍처 기반 자체 칩을 개발한 상태다.
엔비디아는 이날 다우든 장관 발표 직후 "ARM 인수가 영국의 국가안보에 어떤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인수 합의 이후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국 당국과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엔비디아 주가는 이날 전일 대비 3.46% 급락한 614.47달러에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