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당, 보수 텃밭 두 지역 주의회 선거 대패
올 9월 메르켈 후임 총리 선출 앞두고 '낙제점'
"5년 전 기민당 찍은 14만표 녹색당으로 이동"
사민당·녹색당 선전에 '좌파 연정' 정권교체 대두
올해 '슈퍼 선거의 해'를 맞이한 독일의 주의회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민주당(CDU)과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참패했다. 오는 9월 신임 총리를 선출하는 연방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를 줄줄이 앞두고 총선 전초전 격인 주의회 선거에서 16년간 집권해온 전통적 보수정권이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15일(현지 시각) 독일 공영매체 ARD에 따르면 전날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 선거 결과 친환경·좌파 성향의 녹색당이 32.6%를 얻어 기민당(24.1%)을 제치고 압승했다. 이로써 녹색당 소속 빈프리트 크레취만(72) 현 주(州)총리가 무난하게 연정을 꾸릴 수 있게 됐다.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은 11.0%, 자유민주당(FDP)은 10.5%를 득표했다.
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선거에서는 사민당이 35.7%를 득표해 기민당(27.7%)에 압승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기민당에 뒤쳐졌던 사민당이 약 2주 만에 8%포인트의 큰 표차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사민당 소속으로 8년째 집권 중인 말루 드레이어 현 주총리도 이 지역에서 9.3%를 얻은 녹색당과 좌파 연정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
◇백신 개발 지연에 '부패 스캔들'까지...당은 수수방관
파울 치미아크 기민당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을 내고 "보수정당 하원의원 3명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과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정부의 백신 개발에 대한 불만이 합해져 기민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공영 도이체벨레(DW)는 연정이 부패 스캔들과 관련해 강도 높은 징계 대신 소속 의원들에게 각서를 받는 수준의 미봉책으로 유권자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고 지적했다. 선거를 의식해 근본적 해결 대신 보여주기에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앞서 기민당 니콜라스 뢰벨 하원의원은 지난 8일 중국산 마스크 공급 업체와 독일 헬스케어 회사를 중개해 자신의 지역구(바덴뷔르템베르크주) 공급 사업자에 선정되도록 한 대가로 업체로부터 25만유로(약 3억3800만원)를 받았다는 의혹을 뒤늦게 인정했다. 게오르크 뉘슬라인 기사당 원내부대표도 공공 기관의 마스크 조달 사업에 개입해 66만유로(약 8억9000만원)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연정은 사건 초반 혐의를 부인한 이들에게 따로 징계를 내리거나 의원직 사퇴 등을 요구하지도 않아 빈축을 샀다.
◇'보수 본거지'에서 철퇴 맞은 기민당…9월 '좌파 연정' 대두
직전 라인란트팔츠 선거에서 31.8%를 기록했던 기민당의 득표율은 5년 사이 20%대로 급격히 추락했다. 당시 바덴뷔르템베르크 선거의 경우 녹색당이 30.3%를 얻어 기민당(27.0%)과 격전 끝에 가까스로 승리했었다. ARD는 5년 전 기민당을 선택했던 14만5000표가 이번 선거에서는 녹색당으로 대거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보수색이 강한 국가로 알려져있다. 그 중에서도 바덴뷔르템베르크는 친(親)기업·보수성향 유권자가 많은 '부자 동네'로 손꼽힌다. 포르쉐와 다임러 등 글로벌 기업 본사가 위치해 있어 2019년 기준 주민 1인당 연소득이 4만7000유로(약 6300만원)에 달한다. 라인란트팔츠 역시 '보수의 거물'이자 독일 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 전 총리의 고향인 만큼 보수의 텃밭으로 불려왔다.
현지 언론들이 기민당의 패배를 '보수정권 몰락'의 전초전으로 분석하는 이유다. 현재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의 좌장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은 "기민당 없이도 독일에서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날"이라고 했다. 사민당에서는 당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기민당과 결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차례 제기돼왔다.
9월 총선에서 '좌파 연정'이 탄생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DW는 기민당이 여전히 전국적으로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으나 총선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메르켈 정권이 코로나19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데 대한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이른바 '마스크 스캔들'로 보수여당이 유권자로부터 외면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전한 사민당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들이 총선 의석 절반을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정권 교체 확률도 높아진다. 실제 메르켈 총리가 임기 동안 치른 네 번의 총선에서 기민당은 단 한 차례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지난 1월 당대표로 선출된 아르민 라셰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총리가 현재 여권 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지만, 메르켈의 은퇴 이후 당의 '리더십 공백'에 대한 우려가 이미 커지고 있다고 DW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