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
재고 해결하다, 기업들 착해졌다

‘재고(在庫) 비즈니스’가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 뜨고 있다. 재고란 기업이 수요를 예측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 위해 보유하거나, 수요 예측에서 빗나가 팔지 못해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을 뜻한다. ‘이코노미조선’은 후자인 ‘판매 부진으로 발생한 재고’ 개념에 초점을 맞춰, 재고 비즈니스를 기획했다. 그동안 재고 시장은 저품질·비인기 상품을 값싸게 판매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기업은 재고가 생겨도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재고 시장을 외면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변수가 발생했고, 판매 부진을 겪는 기업의 창고에 재고가 급격히 쌓이고 있다. 단순히 생산 후 정가로 판매하는 일반 유통 시장만을 바라본다면 코로나 시대에 지속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재고를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기업들은 ‘계획 생산’ ‘재고 제로(0)’ 등을 목표로 하지만,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틈을 타 재고, 리퍼브(refurbished·반품·전시 제품을 손질한 상품) 등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이들은 가격 경쟁력은 물론 제조사의 브랜드 가치를 최소화하는 유통 방식을 무기로 한다. 나아가 재고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드는 기업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편집자 주]

영국 명품 버버리는 2017년 향수·의류 등 재고를 소각한 사실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다. 이후 재고를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기업이 브랜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착한 마케팅 전략은 필수다." 브랜드 분야 세계적 석학 케빈 켈러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가 한 말이다. 이는 기업의 재고 관리에도 적용되는 전략이다.

영국 명품 의류 업체 버버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버버리는 2017년 향수·의류 등 2860만파운드(약 420억원) 규모의 재고 상품을 불태웠다는 사실이 드러나 뭇매를 맞았다. 2~3년 전만 해도 명품 패션 업체 대부분은 팔지 못한 재고 상품을 태워 처리했다. 자사 재고가 2, 3차 유통 채널로 흘러들어가면 희소성은 물론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재고 처리 방식은 자원 낭비, 환경 오염을 초래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세계 최대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재고를 처리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아마존이 2018년 프랑스 물류센터에 쌓아뒀던 300만 점에 달하는 장난감, 주방 기구 등 재고를 매립장이나 소각장으로 보낸 것이 드러났고,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지구 환경 파괴범’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기업이 변하고 있다. 케빈 켈러 교수의 말대로 재고 관리도 ‘착해지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착한 기업에 지갑을 열고 나쁜 기업에 지갑을 닫는 ‘미닝 아웃(Meaning out) 소비’가 늘면서다. 이는 최근 시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등 비재무적 가치를 중시하는 ‘ESG 경영’과도 일맥상통한다.

해외 명품 업체와 아마존은 재고를 기부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버버리는 자사 재고 소각이 드러난 후 곧바로 "재고 상품을 기부하겠다"고 밝혔고, 현재 구직 여성에게 무료로 면접 복장을 빌려주는 영국 사회적 기업 스마트웍스에 재고 의류를 기부하고 있다. 양털 신발로 유명한 미국 친환경 신발 업체 ‘올버즈’는 의류·신발 등 자사 재고를 자선단체 솔즈4소울즈에 무료로 공급한다. 영국 럭셔리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은 남은 원단을 패션 전공 학생들에게 기부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프랑스는 의류·화장품 등 재고를 폐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준비 중이다. 문 닫힌 프랑스 의류 브랜드 ‘베트멍’ 매장 내 쌓인 옷들.

아마존도 재고를 기부하고 있다. 아마존은 2019년부터 ‘재고 기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아마존 물류센터에 쌓인 재고를 자선단체 굿360과 뉴라이프·바나도스 등에 보내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기부하고 있다. 물론 기부는 아마존 온라인몰에 상품을 올린 판매자의 결정으로 이뤄진다.

박정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한양대 럭셔리연구소 소장)는 "기부는 희소성 유지는 물론 재고·환경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석삼조(一石三鳥) 방안"이라며 "제품을 소비할 때 그 물건과 연관된 환경·인권 문제를 고려하는 소비자 행동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재고 폐기를 법으로 제한해 자원 낭비, 환경 오염을 막는 국가도 있다. 프랑스 상원은 올해 초 사용할 수 있는 의류·신발·화장품 등 재고에 대한 폐기를 금지하고 이를 자선단체 등에 기부하라는 내용을 담은 ‘폐기 방지와 순환경제법안’을 통과시켰다. 에두아르 필리프 전 프랑스 총리는 매년 프랑스에서 한 번도 쓰지 않고 버려지는 새 상품에 가격을 매긴다면 6억5000만유로(약 8533억원)에 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법안이 프랑스 하원을 통과하고 시행되려면 1~2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 루이뷔통 등 프랑스 명품 업체는 재고를 폐기하지 않고 재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루이뷔통은 지난해부터 팔지 못한 의류 재고를 사용해 액세서리 등을 만들고 있는데, 이런 ‘재고 자원 순환 방안’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 경제·사회 분야를 연구하는 아셈연구원 이창훈 원장은 "유럽에선 재고를 태우거나 버리는 방식이 자원 낭비, 환경 오염 문제로 인식되면서 재고 처리 방식이 바뀌고 있다"며 "한국 기업도 국내 시장 상황에 맞게 재고를 처리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plus point

[Interview]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
"기업, 정부 모두 '쓰알못'…재고 고민할 때"

홍수열. 서울대 동양사학 전공·환경대학원 석사,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협의회 활동, 유튜브 ‘도와줘요 쓰레기 박사’ 진행, 분리배출 안내서 ‘그건 쓰레기가 아니라고요’ 저자

"기업, 정부 모두 쓰알못(쓰레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옷을 만든다’ ‘업사이클링(up-cycling·새 활용)을 한다’고 자랑하는데, 버려지는 재고부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타공인 ‘쓰레기 박사’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홍 소장은 11년 동안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협의회(현 자원순환사회연대)’에서 활동하는 등 쓰레기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연구를 해왔다. 최근엔 ‘그건 쓰레기가 아니라고요’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홍 소장은 11월 13일 ‘이코노미조선’과 전화 인터뷰에서 "재고 상황을 살펴보면 식품과 패션 업계가 가장 심각하다"라면서 "쓰레기를 뒤져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 의류로 만드는 것보다 버려지는 재고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명품 브랜드들은 상품의 ‘희소성’을 위해 시즌이 지난 제품은 소각하거나, 매립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브랜드들은 의류를 백화점·아웃렛·할인매장에서 차례로 판매하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각장에서 불태운다. 인공섬유와 천연섬유가 복잡한 방식으로 혼합돼 있어 소재를 분류하기 어려워 재활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홍 소장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의류의 1%가 재고로 소각된다"며 "대부분의 섬유 제품이 많은 양의 원유를 가공한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져서 환경 오염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입장에서는 1t당 20만원가량의 소각 비용이 들기 때문에 비용이 아깝고, 소각 시 발암물질인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나와 환경에도, 우리 몸에도 안 좋다"고 했다.

패션 기업들은 ‘재고가 암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다’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소각한다’는 입장이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재고 관리 체계를 정교화해 중고·하위 시장에서 제대로 유통하거나, 업사이클링 업체에 맡겨 재고를 활용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업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회공헌기금을 사용하기보단, 재고 활용 인력을 창출하는 데 쓰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 소장은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재고를 적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공동 주문 시스템으로, 먼저 주문받고 주문받은 만큼만 제품을 생산하는 카카오메이커스가 대표적이다. 단순 상품 판매, 이윤 추구가 아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업 철학을 담았다.

해외 기업 중에서는 재고를 최소화하는 파타고니아를 모범 기업으로 꼽았다. 파타고니아는 인기 제품이라도 정해진 양만큼만 생산하고, 고객이 반품한 중고 의류를 받아두고 순환시킬 방법을 찾는다. 적자가 나더라도 매출의 1%를 환경 단체에 기부하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책임’이라는 경영 철학을 지킨다.

홍 소장은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은 업사이클링을 강조하지만, 재고와 관련된 전략은 하나도 세우지 않은 상황"이라며 "정부든, 기업이든 먼저 나서서 재고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더 많은 기사는 이코노미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재고 비즈니스] ①위드 코로나 시대 만개한 재고 비즈니스

[재고 비즈니스] ②

재고 시장이 뜬다
[재고 비즈니스] ③ 재고가 생활이 되다
[재고 비즈니스] ④ 역물류 전문 기업 美 ‘옵토로’ 성공 비결
[재고 비즈니스] 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
[재고 비즈니스] ⑥ 재고 쇼핑몰 ‘리씽크’ 김중우 대표
[재고 비즈니스] ⑦ 김수욱 서울대 경영대 교수
[재고 비즈니스] ⑧재고로 새 가치 만든다
[재고 비즈니스] ⑨재고 해결하다, 기업들 착해졌다
[재고 비즈니스] ⑩ 권오경 인하대 경영대 아태물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