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헌법재판소(헌재)가 유럽중앙은행(ECB)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한 양적완화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자, 유럽 전역이 충격에 휩싸였다. 헌재는 3개월 내 ECB가 제도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독일 중앙은행이 그동안 매입한 채권을 다 팔고,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독일 헌재가 ECB의 공공채권 매입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어 유로존이 충격에 휩싸였다.

5일(현지시각) 독일 헌재는 ECB가 지난 2015년 도입한 공공채권 매입 프로그램(PSPP)에 대해 경제, 재정적 효과가 ECB의 정책 목표를 넘어섰기 때문에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not proportionate)'며 독일법에 일부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독일 정부와 의회를 향해 관리 감독이 불충분 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형태로 양적완화가 취해질 경우 적극적인 (관리 감독)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도 했다. ECB가 3개월 내에 이 프로그램이 EU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입증하지 못하면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빠져야 하며 지금까지 샀던 채권을 매각해야 한다고 했다.

PSPP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ECB가 도입한 대표적인 양적완화 프로그램 중 하나다. ECB 회원국 중앙은행 연합체인 NCB가 금융시장에서 유로존 각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매입한 채권 규모는 2조유로(2653조8000억원)를 넘었고, 각국 중앙은행 가운데 재정여력이 큰 독일 분데스방크가 가장 많은 양을 떠안았다.

독일 헌재는 이번 결정이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유로존과 ECB의 재정 지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신종 코로나를 계기로 ECB가 유로존 국가에 대한 자금 지원을 늘리고 있는 만큼 영향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유로존이 검토중인 코로나 채권 발행 무산 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지난 2018년 유럽 최고 사법기관인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뒤집은 사례여서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 ECJ는 독일 경제학자와 법학 교수 1750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이 프로그램이 납세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ECB의 권한을 넘어섰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법적 권한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판결이 나오기 직전까지 주요 언론들은 독일 헌재가 '마지못해' 합법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독일 헌재의 판결이 전해지자 충격파가 유럽 금융시장에 고스란히 전달 됐다.미 달러 대비 유로화 가격은 0.7% 하락했고 독일,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상승했다. 경제활동 재개 기대감에 올랐던 유럽 주식시장은 상승 폭이 축소됐다.

독일 뮌헨 소재 싱크탱크 이포(IFO)의 클레멘스 푸에스트 소장은 "독일 헌법재판소가 ECJ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런던시립대의 파노스 쿠트라코스 유럽법학과 교수는 "독일 헌재가 ECJ의 판결에 사법권이 없다고 말하는 첫번째 사례"라고 했다.

소시에테제네랄의 케네스 브루스 전략가는 "PSPP는 독일법을 위반하지만, 3개월이라는 마감시한이 매우 중요하며, ECB가 그 시한 이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며 "동시에 이번 판결은 유로존이 연준과 달리 통일된 금융정책을 추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