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세계 경제까지 위협할 정도로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안정적인 자금 조달 창구로 활용하던 회사채 시장마저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1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월 첫째 주와 둘째 주 각각 1조7558억원, 1조4245억원 규모 회사채가 발행됐다. 2월 마지막 주 회사채 발행액이 4조2442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3월 들어 회사채 발행액이 절반 이상 쪼그라든 셈이다.
당초 발행하려 했던 목표 금액을 못 채우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일반 대기업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 은행채인 하나은행(신용등급 AA)은 3000억원을 모집하기로 하고 지난 13일 수요예측(투자자 모집)을 했지만 참가 금액은 목표에 못 미치는 2700억원에 불과했다. 포스코그룹 계열사인 포스파워(AA-) 역시 17일 5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기관투자자들의 매수 신청은 400억원에 불과했다. 투자 적격 등급인 BBB+ 등급의 회사채 키움캐피탈 수요예측 참여액도 모집액 500억원에 크게 미달되는 170억원이었다.
문제는 만기가 임박한 회사채를 보유하고 있는 한계 기업들이다. 우량 기업들도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계 기업들이 돈을 끌어올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계 기업들이 회사채 만기 연장에 실패할 경우 돈을 갚지 못해 부도가 날 수 있다. 한대훈 SK증권 연구원은 "2008년 금융 위기 원인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 부실이었다면 이번 위기의 핵심은 회사채"라고 말했다.
◇4월 만기 도래 회사채 6조…벼랑 끝 내몰린 한계 기업들 국책은행에 지원 요청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으로 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4월 회사채 대란'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4월은 원래 1년 중 회사채 발행이 가장 많은 달로, 그만큼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도 크다.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엔 '악마의 달'로 불린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 4월에 만기 도래하는 국내 회사채 규모는 6조5495억원에 달한다.
회사채 만기에 몰린 기업들은 마지막 보루인 국책은행에 손을 벌리고 있다. 탈원전 정책 직격탄을 맞아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두산중공업은 수출입은행에 만기 회사채를 대출로 전환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두산중공업이 발행한 회사채 1조5000억원 중 1조원가량이 올해 4~5월에 몰려있고, 당장 4월 27일에 갚아야 하는 회사채는 6000억원 수준이다.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두산중공업을 실사 중인 수출입은행은 통상 4월 말에 열리는 여신위원회를 두산중공업 회사채 만기일 이전으로 앞당길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5위 해운사인 흥아해운 역시 회사채 만기 풍랑을 버티지 못하고 지난 12일 산업은행에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회사채 267억원가량을 발행한 흥아해운은 작년 12월 주력인 컨테이너선을 장금상선에 매각하고 비핵심 자산 매각, 주식 감자 등 조치를 취했지만 더딘 업황 회복에 우한 코로나 사태로 수출입 물량이 더 줄어들면서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한 국책은행 기업금융 담당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신용등급 BBB급 회사들도 회사채 발행이 가능했지만 올해 들어선 A등급 이상으로 올라서야 채권 발행이 가능해졌다"며 "며칠 전부턴 A급 이상 회사채도 시장 외면을 받고 있어 한계 기업들의 국책은행 러시 현상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업종별 대표 기업마저 줄줄이 신용등급 하락
회사채 발행 규모와 금리를 결정짓는 신용등급도 국내외, 대·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줄줄이 하향세다. 작년 12월 글로벌 신용평가사 S&P는 SK이노베이션과 SK종합화학 신용등급을 각각 BBB+에서 BBB0로 낮췄다. LG화학 역시 A-에서 BBB+로 떨어졌다. 무디스는 이마트와 롯데쇼핑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우한 코로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기업들도 잇따라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대한항공 신용등급을 BBB+로 유지했지만 전망을 '안정적'에서 '하향 검토'로 조정했다. 한진칼에 대해서도 '안정적'에서 '하향 검토'로 전망을 바꿨다. 항공뿐만 아니라 현대로템, OCI도 신용등급이 조정됐으며, 금리 인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보험업권도 한화생명과 한화손해보험을 시작으로 신용등급 하향세가 확산될 전망이다.
이혁재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최근 신용등급이 떨어진 기업들은 매년 회사채 발행 규모가 상당한 기업들"이라며 "당분간 차환(새로 채권을 발행한 자금으로 기존 채권을 상환하는 것) 목적의 발행이 주를 이루겠지만 글로벌 경기 악화, 국내 경기 둔화로 회사채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글로벌 시장도 마찬가지다. 국제금융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비은행 기업들의 회사채 규모는 금융 위기 당시인 2009년 말 48조달러에서 작년 말 75조달러로 급증했다. 이 중 절반 정도가 투자등급의 맨 아래 단계인 'BBB' 등급인데, 상황이 악화돼 신용등급이 강등되면 이 회사채들은 곧바로 채무 불이행 위험도가 높은 정크본드가 된다. 기관투자자들은 내부 규정에 따라 정크본드를 보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투매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유가가 폭락하면서 부도 위기에 내몰린 미국 셰일가스 회사채들이 'BBB' 신용등급에 몰려있다. 정크본드로 전락할 경우 전 세계적인 금융시장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17일(현지 시각) '예외적이고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근거로 단기 회사채인 CP(기업어음)를 사들이기로 한 것도 회사채발 금융 위기를 막기 위한 조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