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미국 온라인 패션 브랜드 에버레인 홈페이지. 영국 왕손 부인 메건 마클이 즐겨 들어 인기를 끈 가방 '더 데이 마켓 토트'를 클릭하자, 이탈리아 토스카나 공장에서 직원 31명이 친(親)환경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떴다. 이 브랜드는 제조 공정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은 모두 재활용 플라스틱을 사용한다. 홈페이지에는 가방 원단 4만5000원, 부자재 2900원, 임금 4만640원, 세금 7090원, 운송 2500원 등 제품 원가(9만8130원) 정보도 나와 있다. 보통 영업 비밀에 속하는 제조 원가를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다. 이 브랜드의 모토는 '극단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 cy)'이다.
패스트(fast) 패션보다 더 빠른 울트라 패스트(ultra fast) 패션 시대에, 최근 이와는 정반대 흐름처럼 보이는 슬로(slow) 패션 브랜드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패스트 패션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생산·공급 주기를 1~2주까지 단축하는 것과 달리, 슬로 패션은 친환경·공정거래·지속가능성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운다. 핵심 소비층은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출생)다. 패스트 패션을 탐닉하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으로 슬로 패션에 주목하는 것이다.
◇슬로 패션에 열광
슬로 패션 열풍은 패션 대기업과 명품 업계를 바꾸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는 올해 패션 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지속 가능 패션' 트렌드가 더욱 강화될 전망이라고 관측했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으로 소비가 결정되는 시대는 끝났다"며 "대안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신념·명분 소비 트렌드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8월 G7 정상회의에서 명품 샤넬·에르메스·구찌, 패스트 패션 H&M·자라·망고, 스포츠 아디다스·나이키 등 150여 의류 브랜드는 기후변화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패션 협약(pact)'을 체결했다. 올해 아디다스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한 친환경 소재 신발을 최대 2000만 켤레 생산할 계획이다. H&M은 2030년까지 의류 소재를 재활용 및 지속 가능한 소재로 100%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구찌는 모피 생산을 중단했다.
국내 패션 기업들도 이런 흐름에 뛰어들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캐주얼 브랜드 '빈폴'도 올해 친환경 패션인 '비싸이클' 라인을 출시했다. 동물 학대 없이 채취한 거위 털로 만든 다운 점퍼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LF의 여성복 '앳코너'는 최근 친환경 데님, 식물성 원료로 가죽 질감을 구현한 '에코 레더' 상품을 출시했다.
단순히 친환경 소재 사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옷을 더 오래 입도록 해서 자원 낭비를 줄이고, 친환경 문화 확산에도 기여한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17일 계절 구분 없는 패션 브랜드 '텐먼스(10MONTH)'를 출시했다. 1년 중 10개월 동안 입을 수 있는 바지(9만9000원), 재킷(17만9000원) 등으로 구성한 슬로 패션 브랜드다. 목민경 텐먼스 기획자는 "아주 덥거나 추운 계절을 빼고 소비자가 연중 내내 가장 많이 입는 옷을 골라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저렴한 옷을 구입해 잠깐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1년 내내 옷장에 두고 꺼내 입을 수 있는 브랜드를 내놓은 것이다. 코오롱FnC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는 지난해 10월 서울 노들섬에 친환경 복합 문화 공간을 열었다.
환경과 인간을 위한 '착한 패션' 운동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존재해 온 흐름이다. 하지만 패션계 주류 문화로 자리 잡기보다는 저변의 대안적 움직임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런 슬로 패션이 대세로 떠오른 배경에는 소셜미디어가 있다고 말한다. 한 트렌드 분석가는 "신념 소비 열풍은 소셜미디어 속 인정·관심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밀레니얼의 독특한 소비 성향이 맞물린 현상"이라며 "소셜미디어의 '좋아요·♥'와 해시태그 캠페인을 타고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패스트 패션의 환경오염 문제가 부각되면서 의류 대여·중고 거래 시장도 주목받고 있다. H&M은 지난해 중고 의류 판매에 이어, 의류 렌털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 온라인 중고 의류 판매 업체 '스레드업(thredUP)'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Z세대(1995년 이후 출생) 소비자 3명 중 1명이 중고 거래에 나섰다고 한다. 쉽게 사서 쓰고 버리는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대안 서비스'가 잇따라 등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