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이미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가이드 RNA가 특정 DNA에 달라 붙으면 그 자리를 캐스9 효소 단백질이 잘라낸다.

지난 9월 11일 중국 베이징대의 홍퀴 덩 교수는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에 발표한 논문에서 "크리스퍼(CRISPR) 유전자가위를 에이즈 환자 치료에 적용해 안전성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DNA의 특정 부위를 잘라내고 정상 DNA로 바꾸는 기술이다.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교정하면 근본 치료가 가능하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번에 그 가능성이 처음으로 저명 학술지의 논문으로 입증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18일 덩 교수를 올해의 10대 과학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크리스퍼 임상시험 첫 논문 발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질병 치료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2012년 처음 등장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특정 DNA를 찾아가 결합하는 유전물질인 가이드 RNA와 결합된 DNA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Cas)9으로 구성된다. 원래 박테리아가 과거 만났던 바이러스를 잊지 않고 있다가 다시 공격하면 방어하기 위해 쓰던 보호시스템이다. 이를 과학자들이 유전자 교정에 이용한 것이다. 올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임상시험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새로운 치료제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베이징대의 덩 교수는 과거 백혈병과 에이즈 환자 치료에 쓰던 줄기세포 이식 수술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적용했다. 백혈병 환자의 골수에서 손상된 혈액 줄기세포를 모두 없앤 다음 건강한 사람의 골수 줄기세포를 이식하는 방법이다. 2008년 독일의 한 환자는 이 과정에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줄기세포를 이식받아 백혈병과 함께 에이즈까지 완치됐다. 하지만 이런 유전자를 가진 기증자를 찾기는 어렵다. 덩 교수는 대신 일반 골수 줄기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적용해 에이즈 바이러스를 차단하도록 유전자를 교정했다.

임상시험 결과 27세 중국인 환자는 백혈병이 완치됐다. 하지만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은 여전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줄기세포의 17.8%만 에이즈 감염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줄기세포 중 절반이 19개월 이상 환자의 몸에서 살아남아 향후 유전자 교정 효율을 높이면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겼다. 미국 UC버클리의 표도르 우르노프 교수는 이 연구를 두고 "달로 로켓을 발사한 것에 맞먹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암과 빈혈 치료에도 효과 입증

세계 최대 제약시장인 미국에서도 올해부터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임상시험 결과가 잇따라 발표됐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지난 7일 올랜도에서 열린 미국혈액학회 학술대회에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암치료에 적용해 안전성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혈액암인 골수종 환자 2명과 뼈와 근육에 암세포가 생긴 육종 환자 1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먼저 환자의 혈액에서 면역세포인 T세포를 추출한 다음,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암세포를 찾아가 결합하도록 유전자를 교정했다. 이를 다시 환자에게 주사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차세대 면역항암제인 키메라항원수용체 T세포(CAR-T)와 같은 원리이다.

연구진은 유전자를 교정한 T세포가 환자 몸 안에서 정상적으로 증식하고 부작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암세포가 줄어드는 치료 효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유전자 교정 효율을 높여 치료 효과까지 얻겠다고 밝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바이오기업인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도 내년에 T세포를 이용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임상시험을 3건 진행할 계획이다.

난치성 빈혈 치료 성과도 나왔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는 지난달 19일 영국 베르텍스 파마슈티컬과 함께 혈액 유전병 환자 두 명에게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시술을 해서 확실한 치료 효과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는 독일인 베타지중해빈혈 환자와 미국인 낫형빈혈증 환자의 척수에서 혈액 줄기세포를 꺼낸 다음 성인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헤모글로빈 생성 유전자를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다시 작동시켰다. 이를 환자에게 주입하자 척수에서 혈액 줄기세포가 신생아 때처럼 다시 헤모글로빈을 왕성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임상시험 결과 1년에 16번이나 수혈이 필요하던 베타지중해빈혈 환자는 시술 후 한 번도 수혈하지 않고 정상 생활을 했다고 회사는 밝혔다. 낫혈빈혈증 환자도 고질적인 통증이 사라졌다.

인체에 직접 주사하는 방식도 시도

에이즈나 암, 빈혈 치료는 환자의 세포를 꺼내 몸 밖에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질병 유전자를 교정하는 방식이었다.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직접 주사해 몸 안에서 유전자 교정을 하는 방식도 시도했다.

미국의 바이오기업 에디타스 메디신은 올해 글로벌 제약사인 앨러간과 함께 실명(失明)을 부르는 유전질환인 레베르 선천성 흑암시 환자의 눈에 직접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주사했다. 현재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에디타스 메디신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처음 개발한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 브로드연구소가 2013년 세운 회사이다.

인체 밖에서 유전자가위를 쓰면 유전자 교정 효율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한정돼 있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질환 부위에 직접 유전자가위를 주사하는 방식은 다양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유전자 교정이 제대로 됐는지 검증하기 어렵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임상 시험 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시장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4조2000억원 규모인 유전자 교정 시장은 2023년 8조3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 중 절반 이상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시장이다.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인수·합병과 공동 연구도 활기를 띠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지난 6월 UC버클리, UC샌프란시스코와 유전체연구소(LGR)를 설립하기로 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최초 발명자 중 한 명인 제니퍼 다우드나 UC버클리 교수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신약 탐색의 선구자인 조너선 와이즈먼 UC샌프란시스코 교수가 이 연구소에 참여한다. 국내에서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원천 기술을 보유한 바이오기업 툴젠이 면역항암제와 유전자 백신 기술을 가진 제넥신과 합병을 시도했다. 주주 반대로 무산됐지만 차세대 CAR-T 면역항암제를 공동 개발하기로 하는 등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