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경기 화성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VR(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실내 행사장의 원형공간에 들어서자 눈 앞에 대형트럭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자동차가 개발 중인 수소트럭 ‘HDC-6 넵튠(이하 넵튠)’이었다.
정면에 주차돼 있던 넵튠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원형공간에 달려왔다. 마치 실제 상황과 같은 긴박한 느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 들었다. 가상공간 속 배경이 프랑스 파리의 라데팡스, 서울 도심,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악지형 등으로 바뀌면서 넵튠의 외관도 계속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상현실에서 넵튠의 차체 외벽을 통과해 내부로 들어섰다. 스티어링휠과 갖가지 계기판과 버튼이 붙은 운전석과 조수석을 포함해 넵튠에 설치된 탕비실과 화장실, 휴식공간 등이 눈에 들어왔다. 눈 앞에 펼쳐진 넵튠의 외관과 내부는 모두 실제 설계 중인 차와 똑같이 구현돼 생동감이 넘쳤다.
이날 현대·기아차는 VR을 활용한 신차 디자인 품평장과 설계 검증 시스템을 최초로 공개했다. VR 품평·설계 검증 시스템은 현대·기아차가 본격 가동하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시설이다.
버추얼 개발이란 다양한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상의 자동차 모델이나 주행환경을 구축해 차량 개발과 디자인 등에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 부품을 시험 조립하며 차를 개발하는 과정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고 디자이너가 원하는대로 빠르게 설계를 바꿀 수 있어 차의 완성도를 높이고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
◇ 20명이 동시에 가상공간에서 디자인 품평…전세계 디자이너 협업도 가능
현대·기아차는 올해 3월 150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최첨단 VR 디자인 품평장을 만들었다. 지난 10월 공개된 수소트럭 콘셉트카 넵튠의 최종 디자인 평가가 이 곳에서 진행됐다. 현대·기아차는 앞으로 개발하는 모든 신차를 VR 장비를 통해 검증할 계획이다.
VR 디자인 품평장은 20명이 동시에 VR을 활용해 디자인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최첨단 시설로 실물 자동차를 보는 것과 똑같이 각도나 조명에 따라 생동감 있게 외부 디자인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차 안에 들어가 실제 자동차에 타고 있는 것처럼 실내를 살펴보고 일부 기능을 작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VR 디자인 품평장 내에는 36개의 모션캡쳐 센서가 설치돼 있다. 이 센서는 VR 장비를 착용한 평가자의 위치와 움직임을 1mm 단위로 정밀하게 감지해 평가자가 가상의 환경 속에서 정확하게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평가자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간단한 버튼 조작만으로 차량의 부품, 재질, 컬러 등을 마음대로 바꿔보며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앞으로 유럽디자인센터, 미국디자인센터, 중국디자인센터, 인도디자인센터 등과 협업해 전세계의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가상 공간에서 차량을 디자인하고 디자인 평가에 참여하는 원격 VR 디자인 평가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또 디자인 품평 외에 아이디어 스케치 등 초기 디자인 단계로까지 VR 기술을 점차 확대하고 실제 모델에 가상의 모델을 반영해 평가하는 AR(Augmented Reality) 기술도 도입하는 등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 설계 품질 검증도 가상공간에서…비용 줄이고 완성도 높여
현대·기아차의 VR 기술은 신차의 설계 품질 검증에도 활용되고 있다. VR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모든 차량 설계 부문으로부터 3차원 설계 데이터를 모아 디지털 차량을 만들고 가상의 환경에서 차량의 안전성, 품질, 조작성에 이르는 전반적인 설계 품질을 평가한다.
새롭게 구축된 VR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자동차 운행 환경까지 가상공간에서 구현해 부품 간의 적합성이나 움직임, 간섭, 냉각 성능 등을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VR 장비를 착용한 연구원들은 가상의 디지털 자동차를 직접 운행할 수 있고 컨트롤러로 운행 중인 차량을 마음대로 절개해 엔진의 움직임이나 부품의 작동 상황을 정밀하게 확인할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연구원들은 VR 설계 품질 검증 프로세스를 활용해 ▲고속도로, 경사로, 터널 등 다양한 가상 환경 주행을 통한 안전성 ▲도어, 트렁크, 후드, 와이퍼 등 각 부품의 작동 상태 ▲운전석의 공간감과 시야 ▲연료소비효율 향상을 위한 차량 내외부 공력테스트 ▲조작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향후 생산·조립 라인 설계에도 VR을 활용한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적용할 계획이다. 이 시스템이 연구개발 전 과정에 완전 도입되면 신차개발 기간은 지금보다 약 20% 단축되고 개발 비용은 연간 15%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사장은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활용해 자동차 산업의 구조 변화와 소비자들의 요구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품질과 수익성을 높여 미래 모빌리티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실하게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