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정권 인수인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출범했다. 경제팀이 자리를 잡고 정책을 조율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제 정책의 세 가지 축 가운데 어느 정도 준비가 돼있던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가 초반에 앞서 나가고, 혁신성장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느낌을 준 듯하다."

작년 초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비공식 모임에서 한 말이다. 김 실장은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라며 "오히려 혁신성장으로 인해 공정경제가 밀리지 않을지 우려되기도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쓸데 없는 걱정이고 엄살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혁신성장이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오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하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혁신성장을 더 중시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경제팀 수장으로서 정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김동연 패싱’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미운 털’이 박힌 모습으로 물러났다. 공정경제가 혁신성장에 밀릴 수 있다고 엄살을 부렸던 김 실장은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 경제 정책 전반을 주도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전임자와 비슷한 처지다. 취임사에서 혁신성장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규제개혁을 강조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청와대와 여당의 벽에 막히고 정치인 출신 실세 장관에 치여 운신의 폭이 좁다.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도입에 반대했다가 무시당하며 체면을 구긴 것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타다 금지법’은 문재인 정부에서 혁신성장의 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홍 부총리는 여러 차례 공유경제 활성화 의지를 밝혔다. "공유경제가 선진국에서 보편적인 서비스라면 한국에서도 못할 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택시기사 분신자살 사건으로 카풀 서비스 확대가 무산됐고, 정책 주도권은 기획재정부에서 국토교통부로 넘어갔다.

지난 10월말 검찰이 승차공유서비스인 타다를 기소했을 때만 해도 정부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신산업은 기존 산업과 이해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있지만 신산업을 마냥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했다. 홍 부총리도 "신산업 창출의 불씨가 줄어들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여당과 국토부가 타다 서비스에 족쇄를 채우는 법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내 이견(異見)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택시업계의 반발을 무마해야 한다는 정치 논리에 밀려 기재부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업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진입장벽을 높이고, 신산업에 제동을 거는 선례가 만들어지고 있다.

혁신의 본질은 뒤집어 엎는 것이다. 기존 제품이 제공하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를 무기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시장과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 업체들과의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새로운 가치와 서비스를 들고 나온 업체에 그 책임을 묻고 갈등 해소 비용까지 떠넘긴다면 혁신은 불가능해진다. 타다 금지법이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벤처업계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를 대변하는 단체 대표는 국토부와의 간담회에서 "이 자리에서 죽을지, 아니면 천길 낭떠러지가 기다릴지 모르는 문을 열고 나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고 했다. 블룸버그 뉴스는 칼럼에서 "세계 어디를 가도 우버 같은 승차공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한국은 예외"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혁신성장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기재부는 최근 보도자료에서 "신산업 분야에서 조기 성과를 내고, 혁신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며 장황하게 성과를 늘어놓았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 2016년 대비 지난해 빅데이터 시장 규모 70%, 같은 기간 인공지능(AI) 매출액 90% 증가 등이다.

그러나 대부분 국내 대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어렵게 이뤄낸 성과를 정부의 공적으로 가로챈 느낌이다. 가장 먼저 예로 든 ‘5G 장비·단말 시장 선점’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5G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98.4%에 이르고, 삼성전자가 5G 장비 점유율 26%로 화웨이에 이어 2위로 올라선 것과 혁신성장 정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보호법 등 ‘데이터 3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빅데이터 시장 증가를 자랑한 것도 어처구니 없다.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가 왜 정부의 공적이라는 것인가. 이해관계자 갈등 조정과 규제 완화 등 정부가 해야할 일을 미적대면서 공(功)만 탐하는 것은 염치 없는 짓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처럼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도 유명무실한 구호가 되고 있다. 대기업들에게 지역별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하나씩 떠넘기는 것이나 기업들의 투자 계획에 정부가 숟가락 얹고 생색내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정권의 치적에 대한 욕심과 조급증에다 정치 논리까지 엉켜 혁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 가고 있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기업들이 혁신의 필요성을 정부보다 훨씬 절박하게 느끼고 있고, 성과를 내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사실이다. 정부가 기업의 발목만 잡지 않아도 결과가 크게 나아질 것이다. 기업이 앞서 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업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혁신성장의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