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94)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별세했다. 산업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1950~1980년대 전자 산업과 화학 산업의 씨를 뿌렸고, 수확까지 해 오늘날 국가 경쟁력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0년 LG그룹(당시 럭키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해 25년간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1150배 성장을 이뤄냈다. 이 기간 중 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70세이던 1995년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며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이후 24년을 소탈한 자연인으로 살았다. 당시 국내 대기업 최초의 '무고(無故) 승계'였다. 새로운 세대가 소신 있게 경영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창업 세대 원로회장단 동반 퇴진도 단행했다. 기업인으로 실적 못지않게 마무리까지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5세에 기업인의 삶을 시작한 그는 크림, 치약에서부터 라디오, TV까지 45년 동안 LG그룹의 성장을 이끌었고, '아름다운 승계'를 한 뒤 마지막 24년은 난(蘭)·버섯 등 자연과 함께 보냈다.
◇대한민국의 전자·화학산업 기틀 만들었다
1925년 경남 진양(1995년 진주시로 통합)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구인회 LG창업주의 장남이자, 지난해 작고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아버지다. LG그룹 창업 초기인 1950년 25세의 나이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입사한 뒤 부친과 함께 LG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구 명예회장은 입사 20년 동안 생산 현장을 누비며, '공장 지킴이'라 불렸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직접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국내 최초의 화장품 '동동구리무'(럭키크림)를 만들었다. 판자를 잇대어 벽을 만든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벽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 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주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구인회 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를 만드는 데에도 수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과 생산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파악한 경영자였고, 이 같은 역량은 LG그룹 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크림 배달 과정에서 뚜껑이 파손되는 일이 생기자 구 명예회장은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뚜껑 개발에 참여했다. 당시 플라스틱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없던 때라 집 뜰의 가마솥에서 요소수지 등의 원료를 녹이면서 실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발전시켰다.
'19인치 컬러TV, 공랭식 중앙 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영상 카세트 녹화기), 프로젝션 TV, CD 플레이어….'
구 명예회장 재임 시절 LG그룹은 이처럼 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선보였다. 1970년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보자"며 연구·개발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럭키 울산공장과 여천공장에는 가동을 하기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1976년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도록 하는 등 그의 재임 기간 동안 70여개 연구소가 설립됐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단순 제조에 급급했던 당시 한국 산업계에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구 명예회장은 우리 기업의 활동 영토를 해외로 확장해, 재임 기간 50여개의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1982년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세운 컬러TV 생산 공장은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 기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한국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혁신 전도사의 마지막 혁신 '잘된 은퇴'
“필생의 업으로 경영 혁신을 생각했고, 혁신의 대미(大尾)로 나의 은퇴를 생각했다.” 1995년 2월. 구 명예회장은 사장단들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다.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WTO 체제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 경쟁 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멋진 은퇴보다는 잘된 은퇴가 되길 기대했다.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턴 터치가 이뤄졌을 때 ‘잘됐다’는 표현을 하듯이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는 뜻을 주변에 전했다.
구 명예회장은 산업화 초기 우리 기업사(史)에서 여러 가지 혁신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1970년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락희화학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투명 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주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는 “기업공개는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자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코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며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 그룹이 됐다.
또 1990년부터 남들보다 한발 앞서 ‘책임과 자율 경영’ ‘고객 중심 경영’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