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 대기업 계열 건설 회사 커뮤니케이션실 황모(30) 대리는 입사 이래 5년째 '팀 막내'다. 팀이 잇따라 신입 사원을 배정받지 못해서 그렇다. 황씨는 경리·회계 업무를 도맡아 한다. 황씨는 "언제까지 전표 쓰는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원 6000명 규모의 A사는 최근 신규 공개 채용 인원이 크게 줄었다. 2015년 200명에 이르던 공채 인원은 작년부터 50명 선이다.
#2. 지방 국립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생 최광호(29·가명)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부장 인턴'이다. 3년째 대기업 공개 채용 시험에서 고배를 들면서 인턴 경력만 4회가 쌓이자 이런 별명이 붙었다. 공공기관과 방송사, 중견 기업 등에서 인턴을 했다. 최씨는 "요즘은 인턴 면접장에 가도 인턴 경험자들이 오는 게 대세"라며 "해가 다르게 스펙은 쌓이지만, 정작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했다.
최근 경기 악화로 기업 신규 공개 채용 인원이 급감하면서 사회 초년생과 취업 준비생 모두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회 초년생은 "막내 생활이 길어지면서 잡무(雜務)에만 필요 이상 능통해졌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의 IT 중소기업에 취직한 황모(여·29)씨는 5년 차로 팀 막내다. 황씨는 "연중 내내 회식 예약 업무도 힘든데 요즘은 연말 송년 회식 장소까지 알아보느라 바쁘다"며 "정작 중요 업무를 배울 기회가 적은 게 불만"이라고 말했다. 4년째 서울 중구의 한 출판사에 다니는 강모(31)씨는 "사내 행사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월말 보고를 취합하고 사원들에게 업무 관련 독촉 전화 돌리는 일에 이골이 났다"며 "막내 충원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취업 준비생들은 '만년 준비생'이다. 서울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강모(여·27)씨는 "취업을 위해 대학 입시 때도 하지 않았던 재수·삼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스펙이라도 쌓자며 전문 자격증 준비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경영학을 복수 전공한 이혜린(여·25)씨는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하려고 생각 중"이라며 "수능 지원자가 65만~70만명으로, 2000년대 들어 유독 많았던 09~14학번이 대거 졸업하면서 취업 스펙의 '극단적 차별화'가 필요해졌다"고 했다.
지난 8월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상장사 69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9년 하반기 대졸 신입 사원 채용 계획에 따르면 올 하반기 상장사 대졸 공채 예정은 4만4821명. 2018년 하반기 채용 예정 인원보다 5.8% 줄었고, 2년 전보다는 10.2% 줄었다. 조사 대상 기업 11.2%는 올 하반기 채용을 아예 포기했다고 답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회사 실적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정치 상황 때문에 기업이 짊어질 위험과 불확실성은 오히려 점점 커지니 채용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선 "시험 없이 알음알음 들어간 비정규직을 대거 정년 보장하거나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니 신입 정규직을 덜 뽑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 전환 같은 정책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경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생산성 향상 없이 단위 시간당 임금만 늘게 돼 기업에 부담을 주게 됐다"며 "기업 처지에서는 고용을 줄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의 '취업 빙하기'는 1997년 IMF 외환 위기 직후 취업난을 연상케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청년 실업의 동태적 특성과 정책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외환 위기 전인 1996년 29세 이하 청년층 신규 취업률은 31.2%였으나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27.1%로 줄었다. 신입 사원 채용이 급감하자 당시의 '막내'들은 3년 내내 신입 노릇을 하며 주말 출근에 일주일에 3~4번씩 야근했다. 1998년 대우건설에 입사했던 손모(47)씨는 "요즘 후배들을 보면 IMF 때 입사해 오랜 기간 후배 없는 막내로 궂은일을 해야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