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 물꼬 트는 '데이터 3법', 1년 동안 방치
與野, 19일 본회의 통과 약속했는데 상정도 안돼
통과만 믿고 작년부터 준비한 IT 기업들 '울상'
IT강국은 옛말…"빅데이터 산업 사망 선고 직전"

춘천에 있는 네이버 제1데이터센터

"어제 통과가 물건너갔다는 소리를 듣고 다들 패닉에 빠졌습니다. 전 세계가 지금 빅데이터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20일 한 IT 업계 관계자는 여야(與野) 3당이 전날 처리하기로 합의했던 이른바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개정안)’ 통과가 사실상 무산된 것을 두고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원내대표끼리 합의했다 해서 당연히 통과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다음달 10일이면 20대 국회가 끝나는데 불안해서 가만 있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당초 국회는 전날 데이터 3법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지난 12일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등 여야 3당은 19일 국회 본회의를 열고 데이터 3법을 포함, 비(非) 쟁점 법안 120여건을 처리하기로 합의했었다. 하지만 데이터 3법은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 등으로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데이터 3법은 개인정보와 관련한 빅데이터를 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해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이 통과되면 누구의 정보인지를 알 수 없는 비식별 개인정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서비스 개발 등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말 데이터 경제 활성화를 위한 인공지능(AI) 강국 도약을 강조하며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하지만 데이터 3법은 작년 11월 발의된 이후 국회에서 1년 째 방치되고 있다.

그래픽=조선DB

한 핀테크 업체 관계자는 "사실 데이터 3법이 지금 당장 통과된다고 해도 미국 등 다른 선진국보다 한참 늦은 것"이라며 "법 개정 이후 개인정보 활용 동의 절차를 개선한다거나 다양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점점 더 늦어져서 걱정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도 "지금까지 올해 안으로 통과될 것이라고 믿고 빅데이터를 이용한 소상공인 대상 서비스를 준비해왔다"며 "그런데 데이터 3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여태껏 투자하고 개발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업계 종사자끼리) 국회 가서 농성이라도 해야 하나 난리다"라며 "도대체 국회의원들은 국민 세금 받아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미래 산업의 원유(原油)로 불리는 빅데이터 산업은 전 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지만 우리나라만 각종 규제에 발이 묶여 뒤처지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지난해 빅데이터 활용 역량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63개국 중 31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 달러 이상인 31개국 중에서는 21위에 그쳤다. 또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국내 기업·기관들의 빅데이터 도입률은 지난해 기준 10%에 불과했다. 한국데이터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산업 경쟁력은 선진국과 5년 정도 격차가 있다.

그래픽=조선DB

이미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개인정보와 관련한 규제 빗장을 풀고 활발한 교류를 통한 시너지도 내고 있다. 후발주자와의 격차를 더 벌리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작년부터 개인정보를 어떻게 다룰지를 규정한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을 시행하고 있다. GDPR에는 상업적 목적 등 모든 연구에 가명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 돼 있다. 여기에 4년 전부터 ‘익명 가공 정보’ 개념을 도입한 일본이 작년 7월 GDPR의 적정성 평가를 통과해 EU와 세계 최대의 개인정보 벨트를 구축했다. 일본 기업들은 개별적으로 유럽에서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원천적으로 개인정보를 활용할 길이 막혀 있어 GDPR 심사의 문턱을 넘는데 애를 먹고 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EU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일본 기업에 밀려 계속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광원 한국데이터산업협회장은 "불과 10년, 20년 전만 해도 IT 강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이제 IT 종주국, IT 속국이 돼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 협회장은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빅데이터 기술을 기반으로 IT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러다 언젠가는 우리가 다른 나라 다른 기업한테 데이터를 사서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빅데이터 산업의 골든타임은 진작에 지났고, 이제 사망선고 직전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야당에서도 데이터 3법 내용에 대해선 반대하고 있지 않아 이번 국회에서 처리는 되지 않을까 싶다"며 "하지만 혹시라도 연말을 넘기면 총선 국면이 되면서 데이터 3법 처리는 유야무야 될 수 있다. 국회의장과 상임위가 관심도 촉구하고 노력해서 빨리 처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은 오는 29일 전체회의 의결을 앞두고 있다.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25일 전체회의에서 의결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처리 일정 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