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산업 볼모로 잡은 美
지소미아·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할 듯
어디까지 양보할지 큰 그림 짜야

미국 정부가 한국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 대해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할지 여부를 장기간 결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현재 무역확장법 232조(외국산 수입 제품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수입을 제한하거나 고율의 관세를 매길 수 있는 조항)에 따라 유럽연합(EU)과 일본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할 지를 검토 중이다.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미국이 EU와 일본에 대해 관세 부과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 기한이 오는 13일이다. 이 때문에 국내 자동차업계는 이 기한 안에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부과 여부도 명확한 입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서는 관세를 면제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등 한미 간 입장이 갈리고 있는 사안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국내 자동차 고율 관세 부과 여부를 계속 결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기아차 등 국내 자동차 회사가 장기간 미국 정부의 볼모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8월 23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11월 13일 협상시한 또 넘길 가능성 있어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EU, 일본 등 외국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 25%의 고율 관세 부과 계획을 추진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수입 자동차와 부품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지 5월 18일까지 검토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고 검토 시한을 180일 연장해 오는 13일까지 최종 입장을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는 13일까지 최종 결론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EU와 일본 등 다른 국가와의 협상 시한을 다시 연장하고 이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부과 여부도 함께 결정이 미뤄져 상당 기간 불확실성이 높은 상태가 지속될 수도 있다"며 "관세를 부과할 의도가 없을지라도 관세 면제를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면서 협상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도 "또 협상시한이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계속 불안한 상태"라고 했다.

이 같은 인식은 최근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서는 고율 관세가 면제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과는 대조적이다. 자동차업계에서는 3일(현지시각)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이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유럽과 일본, 한국 친구들과 아주 좋은 대화를 했다"며 "232조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결실을 보는 것을 희망한다"고 언급한 것을 고율 관세를 면제해 주겠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미국 정부가 고율 관세를 부과할지 여부를 계속 밝히지 않을 경우 한국의 최대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은 계속 불안한 상태를 감수해야한다. 특히 현대‧기아차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 증가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 달 미국 시장에서 5만9029대를 판매했다. 이는 전년 동월대비 11.3% 증가한 수준이다. 10월까지 누적 판매도 58만478대로 전년 동기(55만4686대)보다 4.6% 늘었다.

기아차도 10월 전년 동월대비 10.9% 증가한 5만7대의 실적을 기록했다. 10월까지 누적 판매도 51만3605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49만7144대)보다 3.3%증가했다. SUV 등 일부 차종이 인기를 끈 영향이다. 하지만 아직도 현대‧기아차는 미국 시장에서 2017년 이전의 시장점유율과 판매량(2014~2016년 평균점유율 8.0%, 연평균 판매량 137만2000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면 현대‧기아차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이스신용평가

◇ 지소미아 연장‧미군 방위비분담금 증액도 요구할 듯

더 큰 문제는 미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재연장과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을 증액시키기 위해 국내 자동차 산업을 볼모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자동차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하며 지소미아 재연장이나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증액을 요구할 경우 한국 정부는 큰 난관에 빠지게 된다.

지소미아는 한국 정부가 지난 8월 파기를 선언했고 오는 22일 24시 종료된다. 하지만 마크 내퍼 미 국무부 한국·일본 담당 부차관보, 조셉 영 주일 미국 임시 대리 대사 등 미국 고위 관료들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소미아는 반드시 유지돼야한다"는 목소리를 내며 한국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는 상태다.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증액도 내년 재협상을 앞두고 있다. 한미 양국은 지난 3월 타결한 10차 방위비 협상에서 1조389억원을 한국의 분담금 규모로 정했다. 하지만 1년 후 11차 방위비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 미국 정부는 11차 협상에서는 50억 달러(약 6조원)의 분담금을 한국에 부담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소미아 재연장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할 때 자동차 고율 관세 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은 자동차 고율 관세 부과가 한국에 메가톤급 데미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상협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한국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 가장 효과적인 협상전략을 놓고 큰 그림에서 지소미아와 방위비 분담금, 자동차 고율 관세를 연계해서 협상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은 자동차 고율 관세를 면제해준다는 방침을 서둘러 발표해서 중요한 협상카드를 잃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신 교수는 "정부가 지소미아 문제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 자동차 고율 관세 문제를 전체적으로 놓고 어디까지 양보할 것이고 어떤 것을 받아낼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이 없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했다.

허 원장은 "현대‧기아차와 같은 많은 국내 기업들이 미국과의 외교‧안보 마찰이 경제‧산업계 쪽으로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최근 한일 간의 경제관계도 이런 경우"라며 "미국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줄 만한 빌미를 줄 외교‧안보 갈등을 불러오지 않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