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한국·일본의 전기차 배터리 업체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독일의 폴크스바겐이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공급사로 LG화학, 삼성SDI와 함께 중국 업체 CATL(닝더신에너지과학기술)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중국 배터리 업체가 글로벌 자동차 회사와 맺은 첫 번째 대규모 계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력 제품인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들지 못했던 CATL이 유럽 시장을 뚫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넉 달 뒤 CATL은 BMW와 대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으며 한국 배터리 기업에 펀치 한 방을 더 날렸다. BMW는 중국에서 판매되는 일부 모델을 제외하고, 10년 넘게 삼성SDI에서 배터리를 납품받았다. CATL은 지난해에만 전 세계 44개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일본의 파나소닉(배터리 시장 세계 2위)은 100년 넘는 역사를 가졌고, LG화학(4위)은 대기업 계열사다. 중국의 전기차 제조사이자 배터리 제조사인 비야디(BYD·3위)처럼 워런 버핏이라는 세계 최고 갑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CATL은 설립 10년도 되지 않아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1위에 올랐다. 세계 전기차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전기차 10대 중 4대, 전 세계 전기차 4대 중 1대에 배터리를 공급한다.

◇한국 배터리 업체 충격 던진 CATL

일본 전자부품 기업 TDK 산하 홍콩 기업에서 일하던 중국인 엔지니어 량사오캉·천탕화·쩡위췬은 1999년 ATL을 세웠다. ATL은 애플에 배터리를 납품했다. 이 중 쩡위췬이 2011년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을 위해 독립해 창업한 회사가 CATL이다. 당시 ATL의 기술 인력을 대거 데려갔다. 처음에는 ATL이 CATL 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5년 지분 관계를 정리하면서, CATL은 100% 중국 회사가 됐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 1위인 중국의 CATL은 지난 18일 독일에서 첫 해외 공장 건설에 나서는 등 해외 시장 공략에도 나서고 있다. 사진은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에 설치된 CATL 부스.

수년 전만 해도 CATL의 배터리 기술은 한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이었다. 다른 중국 배터리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전기차 원가의 40~50%를 차지하는 배터리의 핵심은 가격과 에너지 밀도, 안전성이다. 중국은 배터리 시장의 대세인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드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상대적으로 만들기 쉬운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주로 생산했다. 한국·일본의 배터리 생산 원가는 Wh당 1.8위안(약 301원)인데 중국은 2위안이었다. 기술력도 가격도 경쟁이 안 됐다. CATL의 2014년 배터리 생산량은 0.3 GWh(기가와트시), 세계 시장 점유율은 2.1%로 10위권 밖이었다.

그러나 올 상반기 반년 동안의 생산량만 17.3GWh로 늘었고 시장 점유율은 26.4%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지난 8월에는 점유율이 33.5%까지 높아졌다. 상반기 매출은 전년보다 130% 증가했다. 올해 예상 매출은 7조원으로 2015년(9539억원)과 비교하면 7배로 늘었다. 국내 업체들이 배터리 사업에서 여전히 손실을 내고 있지만 CATL은 지난해 6946억원 영업이익을 냈고, 올해는 9200억원가량 흑자가 예상된다.

◇中 정부 업고, R&D에 올인

"중국 공산당이 키운 회사다. 우리가 얕볼 단계는 이미 지났고, 기술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이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화학공학부 교수는 CATL을 이렇게 평가했다. 조 교수는 "국내 모 업체가 CATL의 배터리를 뜯어보니 한국에서는 아직 시도조차 안 된 소재를 양산품에 쓰고 있더라"면서 "혁신 기업으로 변모했고 세계적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CATL은 중국 정부의 전기차 육성·보조금 지원 정책과 함께 자국 산업 보호 정책으로 초고속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16년 말부터 지금까지 중국 업체가 생산한 배터리를 탑재하지 않은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국 배터리 업체를 일방적으로 지원해왔다. 세계 전기차 시장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탄탄한 내수가 중국 배터리 업체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CATL이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지원뿐 아니라 기술 개발에 힘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CATL은 리튬인산철 배터리 생산에 머문 BYD와 달리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한 화학 업체 임원은 "중국 정부 정책에 힘입어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실패를 하면서 노하우를 쌓았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재투자해 기술력까지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CATL은 2015~2017년 매출의 7~8%를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중국 현지 증권사는 "매출에서 R&D가 차지하는 비율이 5% 미만인 한국·일본·중국 경쟁사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경쟁 업체들과는 달리 배터리 이외 다른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CATL의 R&D 투자 비율은 훨씬 높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보호막 걷고 해외로

CATL은 그동안 배터리 수요 대부분을 내수에 의존해 왔지만 2021년이면 중국 정부의 배터리 보조금은 완전히 폐지돼 글로벌 업체와 동등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CATL은 해외 배터리 업체의 중국 시장 진출에 대비해 이미 중국의 6대 메이저 완성차와 합작 법인을 세웠다. 중국 푸젠(福建), 장쑤(江蘇), 칭하이(靑海)에 배터리 제조 공장을 세운 CATL은 해외 공장 건설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 18일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 18억유로(약 2조3400억원)를 들여 배터리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CATL이 해외에 세우는 첫 공장인데 2025년 연간 생산량 100GWh를 목표로 하고 있다. CATL은 독일뿐 아니라 미국에도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이다.

김명환 LG화학 배터리연구소장(사장)은 "CATL은 한국 배터리 기술의 85%, 2년 격차 수준까지 따라왔다"면서도 "LG화학이 20년 넘게 쌓아온 기술력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단기간에 따라잡은 만큼 내구성 등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소장은 "앞으로 한국 배터리 회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기업은 CATL"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