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실패 소식이 또 한 번 한국 바이오 업계를 강타했다. 코스닥 시가총액 4위의 바이오 벤처 헬릭스미스(구 바이로메드)가 글로벌 임상 3상에서 유전자 치료제 신약 후보 물질 '엔젠시스'의 중간 결과 도출에 실패했다고 24일 발표한 것이다. 코오롱티슈진, 신라젠, 에이치엘비에 이어 올해 한국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터져나온 네 번째 임상 실패 소식이다. 헬리스미스 주가는 이날 장 개장과 동시에 하한가(-29.99%)를 기록하며 하루 새 시가총액 7600억원이 증발했다.
코스닥 바이오 종목을 아우르는 '코스닥150 생명기술'의 이날 시가총액은 33조4294억원으로, 연초인 1월 2일 46조1266억원에서 12조6972억원(27.5%)이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가 4.5% 상승하는 동안 시장을 역행해 뒷걸음질친 여파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의 한숨이 됐다.
글로벌 거대 제약사들도 신약 개발 과정에서 미끄러지는 사례가 적잖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K바이오의 좌절은 '어처구니없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기본기의 실패라는 평가가 나온다. 바이오 업계 한 관계자는 "성공을 기대했던 업체마저 황당한 이유로 임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며 "다음에 결과가 나와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임상 3상에서 잇따라 좌절
헬릭스미스가 이번 임상 실패에 대해 24일 내놓은 입장문은 "이런 불상사가 발생해 송구함을 금치 못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임상 환자들에게 진짜 약과 위약(僞藥·가짜 약)이 섞여서 투약됐을 가능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헬릭스미스가 임상 3상 실험을 해온 엔젠시스는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다. 이 병은 고혈당으로 신경세포가 손상돼 극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당뇨 합병증의 하나다.
임상시험은 원래 환자도 의료진도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진짜 약효를 알기 위한 것으로 업계에서는 '이중 맹검(二重盲檢)'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짜 약을 투약했다고 한 일부 환자 혈액에서 엔젠시스가 검출되고 진짜 약을 투약한 환자에게서는 약물 농도가 지나치게 낮은 것이 발견됐다. 약을 투여하는 제약사마저 투약의 진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3중 맹검이 돼버린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믿기 힘든 실수"라고 했다. 헬릭스미스는 1996년 11월 서울대 학내 벤처로 출발해, 2005년 기술상장특례 1호로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이다. 한때 코스닥 시총 2위까지 오르며 바이오 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지만 임상의 기본에서 발목이 잡혔다.
앞서 코오롱티슈진은 지난 5월 관절염 치료제 인보사케이주(인보사)에 대해 미국 FDA로부터 임상 3상 중단 명령을 받았다. 약의 주성분이 바뀌었다는 황당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6월에는 에이치엘비의 위암 치료제 신약 '리보세라닙'이 임상 효과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신라젠도 지난 8월 간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신약 항암제 '펙사벡'이 임상 3상에서 유효한 결과를 거두지 못해 개발을 접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의 신뢰를 깎아먹는 업체들의 행태가 더해졌다. 신라젠의 한 임원은 임상 3상의 중간 결과가 나오기 전 88억원에 이르는 주식을 매도했다. 코오롱도 제품 성분이 바뀐 사실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경험과 전문인력 부족 해결해야"
신약 개발의 마지막 단계인 임상 3상에서 실패가 거듭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경험과 전문가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한 대형병원 교수는 "임상을 설계하고 수행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약 허가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한 회사와 연구자 풀이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임상 3상을 통과해보지 못한 기업이 기초 단계인 설계부터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글로벌 임상 경험이 많은 제약사 등에서 인재를 영입하거나 컨설팅을 받는 방식으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체들이 한두 가지 신약 개발에만 올인하는 한국적 상황도 시장의 충격을 키운 이유다. 펙사백 하나만 내세운 신라젠에 대박을 노린 투기성 투자가 몰리면서 임상 시험 실패는 시장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신약 개발은 기간이 10~15년, 비용도 1조원 이상 드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업체들이 신약 후보군을 늘려야 위험 분산과 장기적 투자가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한 회사가 모든 개발을 전담하기보다는 신약 개발 단계별로 인수·합병이나 지분 투자 등을 통해 여러 회사가 역할 분담을 하는 등 신약 개발에서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