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최대 민영기업 핑안보험그룹, 기술 자회사 기업가치 총 700억달러
빅데이터 3법 태업⋅원격의료 제자리 한국서는 기대하기 힘든 혁신 추구
교통사고로 파손된 차량 사진을 보험사로 보내면 인공지능(AI)컴퓨터가 3분도 안돼 수리비 견적을 뽑아준다. 고객이 이를 수용하면 ‘완성(完成)'이라는 글자가 스마트폰 화면에 뜨고 보험사는 즉각 송금한다. 2017년 도입한 ‘초고속 현장 조사 시스템’으로 지난해에만 이를 통한 처리건수가 730만건에 달했다. 덕분에 허위신고 등을 줄여 연간 7억 5000만달러(약 8850억원) 이상을 절감하게됐다.
개인 대출 신청자의 얼굴 표정을 54종으로 나눠 거짓말 여부를 탐지하는 얼굴 인식 기술을 활용한다. 모바일 앱에 등록한 2억 6500만명에게 질병 진단 및 치료법 제시, 온라인 예약, 의료 전문가 상담 등을 제공한다. 원스톱 의료 건강 생태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앱을 통해 약, 의료기기, 의료 상품권 등도 판매한다.
중국의 핑안(平安)보험 이야기다. 전통 업종에 속한 보험사가 정보기술(IT) 혁신으로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국 경제잡지 포춘은 지난 22일 ‘2019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 발표와 함께 중국 최대 매출 민영기업 핑안보험의 기술 혁신을 조명했다.
중국에서는 핑안보험을 비유할 때 흔히 중국의 기술굴기를 상징하는 화웨이(華爲)보다 매출이 많은 민영기업으로 묘사된다. 지난해 화웨이 매출은 1090억달러(약 128조 6200억원)로 중국 인터넷 간판기업인 알리바바(561억달러)와 텐센트(472억달러)의 매출을 합친 규모를 웃돌았다. 핑안보험 매출은 1635억달러(약 192조 9300억원)로 화웨이보다 50% 많았다.
화웨이의 외형 성장 속도는 '질주'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핑안보험이 포춘 글로벌 500대기업에 진입한 때는 1988년 광둥성(廣東省) 선전(深圳)에서 13명으로 시작한 지 20년이 된 2008년(매출 기준은 2007년)이다. 핑안보험 매출은 2009년까지만 해도 한국의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을 밑돌았지만 2010년 추월한 뒤 격차를 키워왔다. 삼성생명은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가 2009년 매출 기준 316위에서 지난해 426위로 밀린 반면 핑안보험은 같은 기간 383위에서 29위로 껑충 뛰었다.
핑안보험의 경쟁자는 더 이상 보험사에 머물지 않는다. 홍콩과 중국 증시에 동시 상장돼 있는 이 회사는 2017년 시총 기준 세계 1위 보험사에 올랐다. 포춘은 "핑안보험이 미래를 빅데이터의 창조적인 사용에 베팅하면서 알리바바 같은 ‘기술 거인’들과 전투를 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고 전했다.
차량 수리비 견적을 평균 168초에 뽑아내는 ‘초고속 현장 조사시스템’은 6만여개의 자동차 모델에서 사용된 2500만개의 부품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와 14만 곳 이상 정비소의 부품 가격과 수리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핑안은 다른 22개 보험사에도 이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1억 8400만명에 이르는 오프라인 보험 고객과 5억 6500만명에 달하는 온라인 고객 데이터도 핑안의 서비스 혁신을 위한 인프라가 된다. 포춘은 핑안보험의 축적 데이터가 알리바바와 텐센트에 비해 양적으로는 적지만 건강 부동산 등 개인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과 관련된 데이터가 많아 질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전했다.
핑안보험이 지난해부터 깔기 시작한 1분 무인 진료소도 원격진료 기술과 3억건의 온라인 의료 컨설팅 기록 등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 환자는 스스로 혈압과 체온을 재고 영상의 인공지능(AI) 의사에게 증상을 얘기한다. AI의사의 진단을 기반으로 원격지 의사가 추가 질문을 건넨 뒤 복용 약을 추천한다. 상비약 100여 종이 구비된 옆의 자판기에서 약을 구매한다. 없는 약은 휴대폰 앱을 켜 주문하면 집으로 1시간 내 배송된다.
핑안보험그룹에 속한 11개의 기술 자회사가 이 같은 빅데이터 기반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토홈(Autohome)과 하오이성(平安好医生⋅핑안 굿 닥터)은 상장사고, 루팍스 등 3개사는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기업)이다. 포춘은 핑안그룹의 기술 자회사 기업가치 합계가 700억달러(약 82조 6000억원)에 이른다고 전했다.
오토홈은 중국 최대 온라인 자동차 구매 플랫폼으로 하루에 2900만명이 사용한다. 핑안보험이 2016년 인수한 이후 기업가치가 3배 수준인 100억 달러(억 11조 8000억원)로 불어났다. 무인 1인 진료소와 원격진료 앱을 운영하는 하오이성은 지난해 홍콩 증시에 상장한 기업으로 2억 6500만명이 이 회사 서비스를 이용한다.
클라우드컴퓨팅과 데이터분석을 사용해 환자의 병력과 보험기록을 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스커넥트 기업가치는 88억달러에 달한다. 루팍스는 4000만명의 사용자를 둔 중국 최대 P2P대출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업가치가 395억달러에 이른다.
핑안이 확보한 클라우드컴퓨팅과 기술서비스를 다른 은행과 금융회사에 제공하는 원커넥트의 기업가치는 74억달러에 이른다. 중국계 은행 460곳과 1800개가 넘는 중소 금융서비스업체들이 원커넥트를 활용하고 있다.
핑안보험의 기술 사업 진격은 과거 10년간 70억달러(약 8조 2600억원)를 연구개발에 투자한 데 힘입은 바 크다. 포춘은 핑안보험의 창업자 마잉저(馬明哲) 회장(사진)이 향후 10년 150억달러(약 17조 7000억원)를 혁신에 투자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고 전했다.
핑안이 확보한 기술 인력 규모는 일반 보험사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2만 4000여명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800명의 데이터 과학자, 180명의 AI 전문가가 일하고 있다. 핑안이 출원한 기술관련 지식재산권만 1만 5000건이 넘는다.
핑안보험 그룹의 경영진은 회사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에 불과한 기술 사업이 언젠가는 절반 수준으로 늘어나는 날이 올 것으로 예상한다고 포춘은 전했다.
마 회장은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馬雲) 회장, 텐센트를 세운 마화텅(馬化騰)회장과 함께 중국 재계에서 3 마((三馬)로 불리운다. 모두 중국의 혁신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이다. 3마는 2013년 중국 1호 인터넷 전문 보험회사 종안(衆安)온라인재산보험을 공동설립했다. 3마의 첫 번째 '도원결의(桃園結義)'로 비유되는 이 보험사는 2017년 홍콩 증시에 상장했다.
마 회장은 핑안보험그룹을 금융·건강·자동차·부동산·스마트도시 등 5가지 생태계로 나눠 이끌고 있다. 하지만 핑안보험의 진격을 리더의 혁신만으로 설명하긴 힘들다는 지적이다. 데이터 사용 족쇄를 풀기 위한 빅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 3개법안 개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고, 약국 외 매장에서 판매하는 상비약이 20종을 넘지 못하게 돼 있고, 온라인 판매도 불허되고, 의사와 환자 간 원격 의료는 2000년 첫 시범 사업 이후 한발도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토양에서는 핑안보험의 질주는 기대하기 힘들다.
핑안보험의 거침없는 질주 배경에 서방에 비해 개인정보 보호에 덜 민감한 문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기업들도 빅데이터 기반의 서비스 경쟁에 뛰어든지 오래다. 핑안보험 같은 보험사까지 올인하는 중국의 IT혁신이 한국의 혁신 생태계를 가로막는 규제를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