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200㎞쯤 떨어진 탐페레(Tampere)시. 탐페레 의대 바이오 연구동에 들어서자 한 침대 위에 생후 7개월 아이가 누워 있었다. 뒤척이고 손가락을 빠는 아이의 움직임을 침대 위에 설치된 카메라가 찍었고, 바로 옆 화면에는 아이의 움직임 정도와 빈도 등을 측정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떴다.
카메라와 모니터로 된 이 장치는 '넬리'라고 불리는 정신질환 진단 소프트웨어. 2015년 설립된 핀란드 스타트업(신생 기업)인 뉴로이벤트랩이 개발한 것이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사람의 움직임으로 뇌전증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
뉴로이벤트랩이 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데이터 호수(Data Lake)'라고 불리는 의료 정보 서버 덕분이다. 여기에 기록된 뇌전증 환자의 축적된 정보를 분석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는 이곳에 핀란드 550만 국민의 의료 정보를 디지털화해서 저장한다. 국민기업 노키아의 쇠락 후, 핀란드 정부가 통신산업을 대체할 산업으로 바이오·헬스를 키우기 위해 만든 것이다. 뉴로이벤트랩을 설립한 카포씨도 노키아에서 17년간 소프트웨어 기술자로 일했던 사람이다. 노키아의 추적된 지적 자산이 바이오·헬스 산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데이터 호수'의 정보는 일반 기업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민간에 공개된 거대한 의료 정보가 핀란드 스타트업의 '젖줄'이다. 핀젠(Finn Gen) 프로젝트에는 GSK와 화이자, 머크 등 글로벌 9개 제약사를 비롯, 세계적 바이오·헬스 기업들이 몰려들었다.
◇전 국민 의료 정보 디지털화해 공개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정보 처리 전문 기업 티에토(Tieto). 예전 노키아 본사 자리에 있는 이 기업은 헬싱키대 의과대학과 함께 헬싱키 시민들의 의료 정보를 디지털화해서 서버에 저장하는 작업을 2년 전부터 하고 있다. 이 정보들은 나이와 질병, 혈압 등 신체 정보별로 분류, 저장된다.
이렇게 구축된 정보는 맞춤형 미래 의료·바이오 기술 개발의 원천이 되고 있다. 2013년 설립된 핀란드 스타트업 우라(Oura)는 맥박 등 신체 정보를 측정해 스마트폰으로 알려주는 반지(ring)를 개발했다.
유전자 정보를 모으는 핀젠 프로젝트와 '데이터 호수'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스타트업도 탄생했다. BC플랫폼즈는 두 곳에서 받은 의료 정보를 교차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환자에게 최적화된 치료법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이 '데이터 호수'의 정보를 이용하는 스타트업이 핀란드 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탐페레 의과대학 안에만 30여 개 있다. 우리나라에도 국립중앙인체자원은행에 83만여 명의 유전자 정보가 수집돼 있긴 하지만 치료제와 의료기기 개발 등 상업적 목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보안 우려로 미래를 포기할 순 없다"
핀란드에서도 의료 정보를 민간에 제공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핀란드는 2015년 의료 정보를 수집해 민간에 제공할 수 있는 '바이오뱅크법'을 만들었다. 당시 일부 시민단체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돼 악용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핀란드 정부와 의회는 '유럽의 개인정보보호법(GDPR)'을 준수하는 기업에는 의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핀란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집한 정보를 당초 목적 이외에 사용할 수 있는 '의료·사회 정보의 2차 활용법'까지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의료법·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제3자에게 이런 의료 정보를 넘길 수 없다. 핀란드 보건복지부 자리 포라즈마 차관보는 "완벽한 개인 정보 보안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걸 우려해서 무언가를 못한다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핀젠(FinnGen) 프로젝트
핀란드인(Finnish)과 유전자(Genome)의 합성어. 핀란드인은 비교적 동질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유전자 연구에 유리하다. 자발적 참여자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해 분석한다.
☞데이터 호수(Data Lake)
핀란드 국민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의료 기록을 서버에 저장한 디지털 정보. 자신의 의료 정보가 활용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저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