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개장한 아홉 번째 시장… 시민들 힘모아 재개발 위기 넘겨
요일마다 '카멜레온 변신'... 콜라보와 도시재생 상징돼

예술은 멀고 허기는 가깝다. 제 아무리 고고한 사람이라도 정신의 허기가 위의 배고픔을 이기기는 힘든 법이다. 여행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져간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에 적합한 음식 사진이나 인테리어를 의미하는 신조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이 등장했을 정도니까.
"베를린에 음식이랄 게 뭐 있나요? 소시지와 감자 이외에 먹을 게 있을까요? 음식이 너무 형편없잖아요?"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다.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세계적인 잡지 모노클(Monocle)의 여행 가이드 시리즈 '베를린' 편을 잠시 읽어볼까?
"낮은 진입장벽은 개인 사업자들과 하이테크 스타트업, 최근 들어서는 레스토랑 업계에 큰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지난 몇 년 사이 재능 있는 셰프들이 조용히 베를린으로 몰려들어 문화적으로 다양한 요리의 천국(culinary heaven)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명물 시장 ‘마르크트할레 노인’. 입구의 슈퍼마켓 이름처럼 이곳은 다문화와 카멜레온 같은 혁신공간으로 유명하다. 베를린 최고의 인기방문장소다.

베를린은 다양한 외국음식들의 경연장으로 변했다. 큰 돈 들이지 않고 그 현장을 다양하게 체험해볼 수는 없을까? 가능하다. 베를린의 새로운 명소인 ‘마르크트할레 노인’(Markthalle Neun: 노인은 독일어로 숫자 9)에 가면 된다.

독일어로 ‘마르크트할레 노인’(Markthalle Neun)은 아홉 번째 상설시장이라는 뜻이다. 19세기 베를린에 문을 열었던 14개의 재래식 시장 가운데 아홉 번 째 시장이라는 의미다. 매력적인 다문화 지역인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있다.

[[미니정보] 베를린 마르크트할레 노인(Markthalle Neun)]

크로이츠베르크는 장벽과 인접한 서베를린 지역이어서 분단 시절에는 터키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가난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좋아하던 공간이며 지금은 베를린의 음식 혁명을 주도하는 곳이다.

거리음식의 상징인 푸드 트럭.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미국에서 건너온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기에 ‘글로벌 포장마차’라 부를 만하다.

1891년에 문을 연 뒤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세월의 변화와 현대식 슈퍼마켓의 열풍에 경쟁력을 잃어 고전 끝에 재래시장은 문 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베를린 시에서는 이곳을 철거하고 현대식 초대형 슈퍼마켓으로 재개발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지역 주민들과 NGO가 합심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전통시장을 지키기로 하고 논의에 논의를 거쳤다.

"통신기술의 혁명으로 소비와 유통방식도 모두 바뀌었다. 비대면 쇼핑방식과 거대 슈퍼마켓에 위축된 재래시장을 살리고 사라진 고객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2011년 새로운 얼굴로 다시 개장한 것이 오늘의 ‘마르크트할레 노인’이다. 12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이지만 먹거리를 파는 단순한 시장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콜라보와 도시 재생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마실게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처럼 음식에는 술과 음료는 필수품. 요일마다 다른 컨셉의 시장이 펼쳐진다는 내용을 설명한 간판.

이곳은 요일마다 카멜레온처럼 변한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베를린 근교에서 생산되는 로컬 식재료를 판매한다. 근교 농장에서 가져온 싱싱한 식재료가 매력 포인트다. 매달 세 번째 일요일 오전에는 아침식사 메뉴로 가득한 '브렉퍼스트 마켓'이 들어선다.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거리의 음식 경연장인 'street food thursday'가 특히 인기다. 2013년부터 목요일 저녁이면 이곳은 각국의 길거리 음식을 판매하는 베를린 최대, 그리고 최고의 글로벌 실내 포장마차로 변신한다. 무료입장이다. 다문화와 다양한 음식, 독특한 아이디어가 함께 만나는 신개념 복합공간이다.

요일마다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마르크트할레 노인’. 콜라보와 도시 재생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여행자에게 시장 탐방은 언제나 설레는 일, 게다가 세계의 스트리트 푸드가 모여 있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눈도 호사하고 위의 허기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 기쁨 두 배다. 이탈리안 홈메이드 파스타, 중동식 메쩨, 일본의 타꼬야끼와 오니기리, 미국식 버거와 베트남의 쌀국수, 스페인의 타파스와 터키의 케밥, 인도의 카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탈리아 밀라노 방식으로 만드는 빵집.

베를린 인구의 약 15%는 외국인으로 190개국에서 온 47만 명이나 산다. 물론 한국인도 적지 않다. 이곳에서도 ‘프로일라인 김치’라는 이름의 퓨전 한국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 모녀는 김치를 좋아해서 김치버거를 선택했다고 한다.

퓨전 한국 패스트푸드를 파는 ‘프로일라인 김치’에서 김치가 들어간 김치버거를 즐기는 독일의 모녀.

이곳에서 파는 음식들은 길거리 음식답게 대부분 정통이라기보다는 퓨전에 가깝다. 여기서도 비건(vegan)은 인기 있다. 완전 채소 위주의 식사다.

음식이라는 콘텐츠가 물론 중요하지만 시장과 개별 부스의 디자인도 무척 중요하다. 점포마다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저마다 인테리어가 개성 있다. 이곳은 여행자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베를린 최고의 관광코스가 되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무조건 탐방할 장소다.

승합차 앞쪽을 개조한 화장실 입장료 받는 곳. 디자인과 인테리어는 현대 라이프스타일의 핵심이다.

음식이 있으면 음료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 맥주 코너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국의 와인들도 제각각 경쟁을 한다. 어떤 음식에 어떤 음료를 선택했을까, 그 조합은 늘 관심거리다. 음식을 파는 곳답게 요리 좋아하는 사람들 위한 식칼 도마 등 주방도구를 파는 전문점도 있다.

상황 변화에 따라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컨셉’이다. 고객이 참신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업의 본질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제대로 된 컨셉이 공간의 성패를 가른다는 것을 ‘마르크트할레 노인’은 웅변하고 있다.

요리는 현대사회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요리 재료와 도구를 파는 곳도 인기만점이다.

진정한 도시재생은 건물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와 인간의 건강한 삶이 다시 살아날 때 이뤄진다. 퇴행되어 갔던 이 지역은 재래시장의 혁신 덕분에 시크(chic)한, 너무도 시크한 곳이 되었다. 다양성과 다문화는 한 도시의 매력이며 무형자산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베를린이란 도시에서 나를 뺏어갈 수는 있지만,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서 베를린까지 뺏어갈 수는 없다."(You can take me out of Berlin but you can’t take Berlin out of me.)

한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오기 힘든 묘한 베를린만의 매력을 말한다. 베를린을 찾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