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통업계에는 최근 수년간 비보(悲報)가 끊이지 않는다. 온라인 상거래 급부상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찾는 발길이 줄면서 잊을 만하면 백화점·마트의 폐점 소식이 들려온다.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정책) 덕에 소비가 완만하게 회복 중임에도 가격 경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져 대형 유통업체는 상시 구조조정 체제다.
그러나 잡화(雜貨) 유통 체인인 돈키호테는 레드오션 속에서 단 한 차례도 성장세가 꺾이지 않아 종종 일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염가(廉價) 생필품·화장품 등이 주력이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승리조(組)'라는 수식어도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2017 회계연도(2016년 7월~2017년 6월) 매출 역시 1년 전보다 9% 늘어난 8287억엔(약 8조2500억원)을 기록, 1989년 1호점 개점 이후 29년 연속 성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2020년까지 매출 1조엔 돌파를 목표로 잡을 정도로 파죽지세다. 돈키호테는 어떻게 30년 가까이 증수증익(增收增益)의 기록을 써 내려온 것일까.
돈키호테의 핵심 강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싼값에 물건을 조달하는 사업 모델이다. 장기 침체로 가계소득이 늘지 않아 값싼 제품 수요가 꾸준히 늘어난 덕분에 맨손으로 창업했던 야스다 다카오 회장은 돈키호테를 300개 넘는 매장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다.
야스다 회장은 창업 초기엔 파산 기업이 버린 상품, 덤핑 상품, 반품 상품 등 처치 곤란한 제품을 제조업체나 도매업체로부터 직접 사들여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돈키호테는 이런 상품 조달 방식을 '현장 구매'라 부른다. 1990년대 유통업계 관행으로는 상상도 못할 방식이어서 현장 직원뿐 아니라 야스다 회장 역시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절반 가격에 사들여 20~30% 싼 가격에 파는 방식은 소비자와 돈키호테 모두에게 이익이었기에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돈키호테 매출의 30~40%는 지금도 '현장 구매'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산된다.
매출이 1000억엔대를 넘어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만들어 직장인·주부 고객층을 공략 중이다. 중국·베트남 등지에 PB 상품을 위탁 생산하되 직접 생산 공정에 관여해 비용을 최대한 줄인다. 올해 6월엔 불필요한 기능을 뺀 고화질 50인치 TV를 5만4800엔에 출시했는데, 비슷한 기종의 절반 가격이다 보니 일주일 만에 1차분 3000대를 전부 팔아치웠다. 이에 질세라 다른 가전 양판점들이 할인 경쟁에 나서면서 '돈키호테가 가전 유통업계의 가격 인하 전쟁에 불을 붙였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돈키호테는 2020년까지 PB 제품 판매 비율을 현재의 10%에서 15%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돈키호테 매장에 들어서면 일본 매장답지 않게 화장실 휴지, 과자, 장난감, 전자제품, 화장품 등 온갖 물건이 뒤죽박죽 섞인 채 쌓여 있다. 사방에서 "돈~돈~돈키호테~♪" CM송이 들려오는 와중에 각종 제품으로 빼곡한 진열대 사이를 헤매다 보면 처음 방문한 고객은 마치 밀림(密林)에 온 것처럼 길을 잃을 지경이다. 이른바 '압축 진열' 방식이다.
'압축 진열'은 창업 초기 이곳저곳에서 구해온 제품을 그때그때 적당한 곳에 놓다 보니 자연스럽게 탄생한 진열 방식이다. 그러나 다카오 회장은 이러한 진열 방식을 역발상 전략으로 활용했다. 일부러 '보기 어렵고, 고르기 어려운' 매장으로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고객들이 매장 안을 탐험하듯 자세히 둘러보며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압축 진열이라는 역발상 전략을 끌고가는 핵심 원동력은 현장 직원에게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인사 제도다. 돈키호테는 상품 구입에서부터 판매 가격 결정, 매장 연출, 아르바이트 관리 등을 본사가 간섭하지 않는다. 동네·지역별 고객 특성을 가장 잘 아는 현장 직원에게 실무를 맡겨 매출을 최대로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다. 대신 철저한 성과주의를 적용한다. 실적에 따라 6개월마다 연봉이 조정된다. 때로는 점장이 점원으로 강등되고, 점원이 점장 역할을 맡기도 한다.
최근 일본 유통업계에선 치열한 가격 할인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냉장고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아예 냉장고를 없애고 냉장·냉동식품을 팔지 않는 대형 마트도 생겨날 정도다.
2000년대 중반 돈키호테는 유통업체 간 출혈 경쟁이 심해지자 게릴라식으로 점포를 늘려오던 사업 확장 전략을 아예 덩치를 확 키우는 방향으로 조정했다. 2007년 대형 수퍼 체인인 나가사키야(長崎屋)를 사들여 '메가 돈키호테'라는 새 브랜드를 출범시킨 게 대표적이다. 돈키호테는 특유의 저돌적인 운영 방식으로 싼값에 고품질 제품 판매를 늘리며 꾸준히 세(勢)를 불려나가고 있다.
일본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3~4년 내 대형 수퍼 체인 시장이 이온과 이토요카도의 2강 체제에서 돈키호테까지 포함한 3강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도심 교외 지역에는 '뉴메가 돈키호테'라는 대형 마트를 세워 수익 다각화도 모색 중이다. 기존 고객 중 30~40%는 20대였을 정도로 고객층이 편중된 편이었는데, 매장 형태를 달리하며 주부·직장인 등 기존 유통업체의 고객층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올해 2월엔 채소 등 신선식품 배달 서비스도 출시했다. '메가 돈키호테'에 있는 상품을 58분 안에 배달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1시간 배송 서비스를 출시해 파장을 일으킨 미국 상거래업체 아마존을 겨냥한 서비스다. 다카하시 미쓰오 돈키호테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실적 발표회에서 "우리는 채산성보다도 영업 규모를 키우는 것을 우선시한다"며 "적극적으로 가격을 더 낮춰 고객 수를 늘리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돈키호테의 또 다른 캐시카우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일본 제품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는 트렌드를 포착한 돈키호테는 발빠르게 한국어·중국어 등 외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배치했다.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마케팅이 미미했던 상황에서 돈키호테는 면세 관광객을 단숨에 끌어들였다. 돈키호테의 외국인 매출은 2014년부터 백화점계 1위인 미쓰코시이세탄(三越伊勢丹)을 앞질렀다.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절반가량은 돈키호테를 찾는다. 한국에서 돈키호테 상호명이 익숙한 편인 것도 외국인 고객 확보에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야간 영업 시간을 늘리고, 화장품·의약품 등 외국인이 선호하는 제품을 더 싼값에 조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지난 회계연도의 면세품 판매 실적은 364억엔이었는데, 이를 3년 안에 20% 이상 늘리는 것이 목표다.
'후발 업체는 상식을 벗어나야 한다. 업계 상식은 이미 승리한 기업의 논리이지, 승리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야스다 다카오 회장은 자서전에서 그의 성장 전략을 이렇게 표현했다. 돈키호테라는 상호는 야스다 회장의 저돌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야스다 회장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1973년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한 야스다 회장은 부동산 회사에 취업했다가 회사가 망하자 5년 동안 도박에 빠져 허송세월했다. 29세 때인 1978년 전 재산을 투자해 '도둑시장'이라는 소매점을 창업했다. 지금의 돈키호테처럼 20대 젊은 층을 대상으로 도심 외곽에서 덤핑 제품을 팔아 제법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덩치를 불리려 도매업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난을 못 견디고 실패했다.
도둑시장으로 할인 잡화점 사업 모델의 성공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봤던 야스다 회장은 1989년 재기를 꿈꾸며 돈키호테 1호점을 냈다.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엔 소매 할인점 사업에 집중했다. 유통업계의 방정식을 버리고 '압축 진열' '야간 영업' 등 돈키호테만의 해법을 찾아 성공 기반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당시 편의점 영업시간은 밤 11시까지였는데, 돈키호테는 12시까지 영업했다. 20·30대 젊은 층의 심야 쇼핑 수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야스다 회장의 과감함이 정점에 이른 것은 2003년 여름이었다. 당시 돈키호테는 고객 요구에 따라 아스피린 등 일부 의약품을 매대에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규제 당국인 후생노동성이 거칠게 압박해 오며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약사의 복약(服藥) 지도 없이는 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규제 때문이었다.
야스다 회장은 매장에 화상 전화를 설치해 원거리 복약 지도를 거쳐 의약품을 판매하려 했다. 화상 전화 개념조차 생소한 당시로선 파격적 방법이었다. 그러자 후생노동성은 화상 전화는 약사가 고객 얼굴을 보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사법 위반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후생노동성은 실세 부처라 일개 기업이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니라는 분위기였고, 많은 언론이 야스다 회장의 약품 판매 포기를 점쳤다.
그러나 야스다 회장은 반년 후 묘수를 찾아내 의약품 판매를 재개했다. 당시 의약법엔 외딴섬 주민을 위해 카탈로그에 원하는 약품을 신청하면 약사의 대면 복약 지도 없이도 의약품 판매를 허용했는데, 야스다 회장은 이를 활용해 매대에서 의약품을 내리고 대신 상점 안에 카탈로그 신청서를 비치해 의약품 판매를 재개한 것이다. 후생노동성은 재차 돈키호테를 압박하려 했으나, 야스다 회장은 도쿄 도지사부터 총리실 규제완화위원회 등 탈(脫)규제파 오피니언 리더를 여론전에 끌어들여 끝내 화상 전화로 약을 판매할 수 있게 하는 규제 완화를 이끌어냈다. 일본 사회에서 기업이 가스미가세키(일본 관청가)에 맞서는 것은 극히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업계 상식을 따르는 것은 덩치가 큰 선발 기업과 똑같은 씨름판에서 같은 규칙으로 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야스다 회장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