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높이 솟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한국의 건축 제도는 획일적인 편입니다.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건축물 높이를 획일적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콧 사버(Scott Sarver·55) SMDP 디자인 수석 겸 최고경영자(CEO)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1999년부터 한국에서 내로라할 만한 건축물을 설계해온 그에겐 획일적인 건축 규제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사버 CEO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1999년)을 시작으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3차(2004년), 일산 킨텍스 국제컨벤션센터(2005년), 서울중앙우체국(2007년) 등 국내 유명 랜드마크 건물을 설계한 ‘한국통’ 건축가. 초고층 전문 건축 설계회사 디스테파노 파트너스의 CEO를 거쳐, 지금은 2011년 미국 시카고에서 설립된 SMDP의 CEO를 맡고 있다.
조선비즈가 지난 12일 한국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점검차 방한한 사버 CEO를 만났다. 그는 도심 오피스 빌딩 ‘센트로폴리스’와 대신 F&I가 매입한 한남동 외인 주택 부지의 주거 단지 설계를 맡고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한국의 대형 건축물을 설계한 그가 한국 건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한국에 뛰어난 건축가가 많지만 규제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건축 관련 규제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버 CEO는 ‘건축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초고층 건물이 많은 시카고를 예로 들었다. 그는 “시카고는 건축물을 지을 때 높이가 아닌 용적률로 규제한다”며 “이렇게 하면 고층 건물 옆에 저층 건물이 올라가고 건물 사이 거리도 멀어져 지상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축물 높이를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보다 다채로운 스카이라인을 조성하는 것이 도시 경관이나 개발 가치 측면에서 더 낫다는 것이다.
건축물 높이 규제가 오히려 개발 사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사버 CEO가 설계한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의 주상복합 ‘두산 위브 더 제니스’는 원래 30~40층 높이로 7개 동을 지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설계대로 건물을 지으면 인근 학교 일조권이 침해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부산시와 협의 끝에 건물을 80층으로 높여 3개 동을 지었고, 건물 간격을 더 띄우는 방법으로 학교 일조권도 지켜냈다.
사버 CEO는 현재 이뤄지고 있는 한국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종로구 공평1·2·4지구에 지어지는 오피스 빌딩 '센트로폴리스'의 외관 디자인도 그의 손을 거쳤다. 지하 8층, 지상 26층, 연면적 14만1474.78㎡짜리 건물로, 2018년 상반기 완공될 예정이다. 그는 "한국적인 특성이 강한 인사동 초입에 들어서는 건물이란 점을 설계에 반영했다"고 강조했다.
사버 CEO는 건물 설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존중(respect)’을 꼽았다. 그는 “건물 주변의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달리 말해 한국적 의미로 ‘예(禮)’를 갖출 필요가 있다”며 “센트로폴리스의 경우에는 주변 종로와 인사동, 피맛골 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건물의 외관과 설계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건물 외관에 한국 전통 문양인 격자무늬를 재해석한 디자인을 접목하고 건물 하단에 한옥의 기단부를 도입한 것이나, 공사현장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유적을 보존하는 역사문화전시관을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에 설치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 채당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한남동 외인주택 단지는 또 어떻게 지어질지 궁금했다. 외인주택 설계를 맡은 사버 CEO는 “대지의 단차가 심해 설계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덕에 지어지는 단지인 경우 주민들을 위한 야외 공간을 만들기 어렵다”며 “넓은 평지를 활용해 5성급 호텔 수준의 커뮤니티 시설과 수준 높은 조경을 갖춘 공원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