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이 국민연금에까지 튀었다. 검찰이 작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준 것과 삼성이 최순실씨에 대한 지원을 한 것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는지 수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요 주주였던 국민연금이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큰 손실이 날 것을 알면서도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국민연금이 그런 결정을 하는 과정에 '검은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과 삼성은 "터무니없는 의혹"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국민연금 수천억 손실 감수하고 합병 찬성?
작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이사회가 합병 결의를 할 때는 주주총회를 쉽게 통과할 수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단숨에 삼성물산 지분 7.12%를 확보하고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이라며 반대에 나서자 상황이 급박해졌다. 삼성이 제시한 합병 비율 1대0.35(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35주)는 삼성물산의 주식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해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제값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당시 엘리엇과 달리 두 회사 지분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엇의 주장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합병 전 삼성물산 지분 1조2200억원어치, 제일모직 지분 1조1800억원어치를 갖고 있었다. 삼성물산 주주로 볼 때는 손해 보는 장사여도 제일모직 주주로서는 이익을 보기 때문에 전체 투자금을 모두 볼 때는 찬성하는 게 타당했다는 주장이다.
또 삼성 측은 "합병 비율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합병 결의 이사회 전 한 달간 주가를 기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임의로 조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 합병 찬성에 따른 손익 여부를 현재 시점에서 따져보면 국민연금의 결정이 수천억원대 손실을 감수한 황당한 결정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불공정' 합병 비율의 주요 논거는 삼성물산의 주식 가치는 저평가, 제일모직은 고평가됐다는 것이었다. 특히 제일모직의 경우 당시 추진 중이던 바이오 사업의 가치가 1조5000억원으로 평가된 것이 과대평가됐다고 지적됐다. 하지만 최근 상장에 성공한 제일모직 바이오 사업(법인명 바이오로직스)은 시가총액이 11조원에 달한다. 통합 삼성물산 법인의 바이오로직스 지분율(43%)을 감안하면 당시 제일모직 바이오 사업 지분 가치는 4조9000억원대에 이른다. 가치가 과대 평가됐다기보다는 과소평가된 셈이다. 합병 당시 삼성그룹이 바이오산업을 향후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으나, 시장에서는 바이오로직스가 증시에서 이 정도로 고평가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삼성물산의 경우에는 주력인 건설 부문의 부진이 심각한 상황이다. 합병 당시에도 삼성은 아파트 브랜드 '래미안'을 매각하고 주택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택 부문은 합병 이후에도 줄곧 내리막이었다.
23일 현재 합병 삼성물산 주가는 13만6500원으로 합병 발표 이전보다 16.5% 떨어져 있다. 일각에선 이런 주가를 근거로 국민연금이 손실을 볼 걸 예측하고서도 합병에 찬성했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하지만 한 달 전(10월 25일) 삼성물산 주가는 16만9000원으로 합병 전보다 3.4% 높은 상태였다. 변화무쌍한 주가를 근거로 합병 결정이 틀렸다, 옳았다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주장일 수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시장 상황에 따라 평가손익이 발생할 수 있으나, 국민연금은 장기 투자의 관점에서 주식을 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병 찬성 과정에 '검은손' 개입 논란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지분 11.2%)였던 국민연금은 주주총회 일주일을 앞두고 합병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투자위원회 등 회의 내용을 즉각 공개하지 않아 '밀실 결정'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앞서 있었던 SK와 SK C&C의 합병 때는 비슷한 사안인데도, 국민연금은 투자위원회가 아닌 보건복지부 산하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통해 합병 반대 결정을 했다.
이에 대해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합병 찬성·반대는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결정하는 게 원칙이고, 투자위원회가 판단이 곤란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하는 것"이라며 "기금 운용 지침에 투자위원회 결정 내용은 공개하지 않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당시 투자위원회에서 과반으로 '찬성' 의견이 나왔기 때문에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의사 결정권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삼성 측의 이런 해명에도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을 결정하는 과정에 외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배제되는 건 아니다. 국민연금의 결정과 최순실 게이트를 연결짓는 측에선 당시 청와대와 국민연금 핵심 인사 간의 인맥을 주목한다. 당시 최광 국민연금 이사장(부산고)은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대구고)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와 각각 고등학교 동문이다. '낙하산 인사'들로 의심을 받는 만큼 청와대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