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5월 15일, 구미에 있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 개발실. 연구원들이 숨을 죽이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SNU’ 화면에 서울대학교 영문 약자가 뜨자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연구소를 연결하는 통신 네트워크가 성공적으로 구축됐다. 한국 인터넷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76년 출범한 전자기술연구소 책임 연구원으로 온 저의 미션은 컴퓨터 국산화였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컴퓨터끼리 서로 네트워크가 이뤄진다는 것을 보고 온 터라 미션에 컴퓨터 네트워크를 추가했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허락받지 못했고 궁여지책으로 다른 프로젝트인 ‘컴퓨터 아키텍처 개발 계획’에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계획을 추가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연구소의 전용회선 통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전길남 KAIST 명예교수(73). 그는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2012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ISOC(인터넷 소사이어티)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Internet Hall of Fame)에 전 명예교수를 헌액하며 ‘아시아에 인터넷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한국인이자,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는 요즘도 인터넷 역사를 기록하고 차세대 인터넷 거버넌스(질서)를 만드는 각종 국제 행사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6월 21~23일 사흘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 인터넷 콘퍼런스'에서는 ‘인터넷: 과거 50년과 미래 도전들'이라는 주제로 연설한다. 올해 하반기에는 자서전도 내놓는다.

당시 구축한 교육 연구망 SDN(Software Development Network)은 미국 아르파넷 개발자들이 만든 차세대 네트워크 프로토콜인 TCP/IP를 이용했다. 이 기술의 실현에 성공한 국가는 미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였다. SDN은 이후 대학 연구소와 기업 연구소들이 효과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컴퓨터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전 명예교수는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UCLA(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36세 나이에 전자기술연구소의 책임 연구원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운동광’으로 알려진 전 교수는 1987년 등반대장으로 유럽 3대 북벽(마테호른·그랑드 조라스·아이거) 등정에 성공해 국민훈장 기린장을 받았고 1997년 인터넷 보급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보문화대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KAIST 정년 퇴임 이후 일본 게이오(慶應)대 특임교수로도 활동했다.

일본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국제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국의 인터넷 역사를 차분하면서도 힘있게 설명했다. 가끔 웃음을 터뜨릴 때엔 대가의 풍모에서 어린이의 순수함이 묻어났다.

◆ 척박한 정보화 토양에 기술이라는 씨앗을 뿌리다

-1979년 36세의 나이에 한국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생일 때였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입니다.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부모님이 일본으로 넘어갔습니다. 오사카에서 수학과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자랐습니다. 1960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을 맡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본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 협정 체결(미국과 일본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오사카에서도 큰 시위가 있었는데, 당시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연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일본)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연설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머릿속으로 ‘내가 한국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한국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한국에 가지 않고 미국 UCLA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1969년 미국 국방부는 UCLA, 스탠퍼드대 등 주요 4개 대학 컴퓨터를 연결하는 ‘아르파넷(ARPANET)’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게 오늘날의 인터넷 시초가 됩니다. 아르파넷 연구에 참여했습니까.

“부모님이 한국행을 반기지 않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아르파넷 연구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빈트 서프(Vinton Gray Cerf), 존 포스텔(Jonathan B. Postel· IANA 초대 운영자), 스티브 크로커(Stephen Crocker·아르파넷 프로토콜 개발자) 등 초기 인터넷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모두 UCLA 학우였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인터넷 개발을 할 때, ‘모르면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SDN에서 TCP/IP 네트워크 구축 연구를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TCP/IP 네트워크는 서로 다른 네트워크 사이에서 데이터 패킷의 최적 이동 경로를 정해 다음 장치로 전달하는 라우팅 기능이 있습니다. 라우팅 기능을 담당하는 통신 전용 컴퓨터를 구할 수 없어 애를 많이 먹었지요. 냉전 시대라 미국이 관련 기술을 선뜻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 기술로 만든 국산 컴퓨터로 라우팅에 성공했지만 성능은 별로였어요. 그러나 세계에서 자국에서 만든 컴퓨터로 라우터를 쓴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인터넷 역사에서 SDN 구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SDN은 TCP/IP를 기반으로 개발됐기 때문에 한국 인터넷의 효시로 평가받습니다. 보통 미국에서 개발된 최첨단 기술들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은 198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일본을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태동했습니다. 인터넷이 무엇인지, 정보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에서 말이죠.”

◆ 인터넷 확대로 네이버, 엔씨소프트 등 벤처 낳았지만 스마트폰 못 만든 건 아쉬워

-1992년 HANA/SDN 운영 주관 기관이 한국통신(KT)으로 넘어가고 1994년에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상용 서비스 ‘코넷’ 이 등장합니다.

“1983년까지 정부가 인터넷 개발에 재정 지원을 해주었고, 1984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한국통신(KT)이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당시 한국과 미국 전용선을 설치해야 했는데, 1990년 당시 돈으로 20만달러가 들었습니다. 한국통신, 데이콤, 시스템공학센터, 전자통신연구소, 삼성전자, LG전자와 대학교들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경제규모가 크지 않던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비용이었습니다.

2014년 6월 인터넷 상용화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인터넷 상용화 20주년과 GIGA 시대’ 특별 포럼에서 전길남 명예교수가 한국 인터넷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때부터 SDN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망(HANA)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1992년 KT가 네트워크 운영도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94년 KT가 코넷을 서비스하면서 일반인들도 인터넷을 쓰는 인터넷 상용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994년 월드와이드웹(WWW)이 등장하면서 인터넷이 대중화됩니다.”

-인터넷 상용화 이후 벌어진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상용화서비스 전인 1990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일본을 경유한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면서 하나(HANA)망이 미국에 연결됩니다. 한국의 인터넷이 비로소 글로벌 인터넷이 된 셈이죠.

1990년대 중반 이후 넥슨, 다음, 네이버 등 주목할 만한 인터넷 벤처들이 나왔습니다. 또 1998년 두루넷을 필두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나온 것도 중요합니다. 미국과 일본은 종합정보통신망(ISDN)을 고집했어요. 그래서 두 나라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는 우리 보다 늦었습니다. 같은 해 엔씨소프트가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서비스합니다. 1999년 국내 인터넷 사용자는 1000만명을 돌파합니다. 우리나라 인터넷이 급격히 발전한 ‘티핑 포인트’가 만들어졌습니다.”

-2000년 이후 주목할 만한 일들은 무엇입니까.

“2003년 1월 25일 우리나라 인터넷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인터넷이 몇 시간 동안 마비됐습니다. 이처럼 인터넷이 완전히 무너진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1.25 인터넷 대란에 관한 제대로 된 분석 보고서가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2008년 인터넷 악플에 괴로워하며 배우 최진실씨가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지요. 인터넷 폭력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선구적 연구를 통해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인터넷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9년엔 한국에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2010년 카카오톡이 나오죠. 우리나라에 컴퓨터를 연구하는 사람이 수천 명은 되는 데 왜 스마트폰을 개발하지 못했을까도 돌아봐야 합니다.”

◆ ‘최초’ ‘1등’ 타이틀 중요치 않아...후진성 없애야 진짜 인터넷 강국

-온라인 게임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최초 역사를 쓰고도 세계무대에서 사라지는 서비스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빨리 잘 만드는 데 익숙하지만 계속 응용해서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족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워드프로세서’나 ‘스프레드시트’는 MS에서 가장 먼저 만들지 않았습니다. 보통 가장 먼저 개발된 것은 대부분 망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애플입니다. 애플은 맥,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팟 등을 제일 먼저 만들고 성공도 시켰습니다. 연구 분야에서는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개발 분야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겁니다.”

- 1982년 5월 SDN 구축을 기점으로 하면, 한국인터넷 역사는 30년이 넘습니다. 한국 인터넷 발자취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인프라와 하드웨어에서는 앞서갔지만, 정작 유통되는 정보의 질은 낮았습니다. 이제 1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진성을 정리하는 것이 선진국입니다. 1등, 2등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후진성을 꼽아보자면 대표적인 게 주민등록번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생활(프라이버시)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별, 출신, 생년월일까지 파악할 수 있는 관리 번호는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해킹까지 당해서 인터넷에 노출된 상태예요. 선진국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또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보안입니다. 북한과 주변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보안 경쟁력은 무척 중요합니다. 실제로 사이버 테러와 해킹은 지금도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국가 발전에 사명감이 있는 학계, 산업계 인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선진국이 되려면 오피니언 리더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인터넷 기업 대표들이 그런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국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창업가나 CEO들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가 오바마 대통령을 자연스럽게 만나는데 김정주 넥슨 회장이나 이해진 네이버 의장도 그럴 수 있어야죠. 그들도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적으로 좀 어려운가 봅니다.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있습니다. 언론에서 도와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인터넷 업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는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이유가 있습니까.

전길남 명예교수는 지난 30년 간 인터넷 산업에 있었던 일을 정리한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직접 정리한 ‘An Asia Internet History’를 들어보이고 있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기록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으면 인터뷰를 잘 안 합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핵심 멤버는 인터뷰를 자주 해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인터넷 기업 창업자 김범수, 김정주, 이해진 등의 한국어 인터뷰를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 명예교수는 1982년 말 KAIST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전 교수의 연구실은 KAIST에서 유일하게 컴퓨터를 보유한 개인 연구실이었다.

전 교수 연구실은 한국 IT 업계의 요람과 마찬가지였다. 허진호 아이네트 창업자, 김정주 넥슨 창업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리니지 개발자), 박현제 전 솔빛미디어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대표 등이 그의 제자였다.

2003년 허진호 아이네트 창업자(왼쪽에서 다섯번째) 등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 기념 행사에 참가한 전길남 명예교수(오른쪽)

연구실 분위기는 엄격했다. 낮에는 네트워크 연구에 매진하도록 전 교수가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밤에는 연구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전 교수는 운영체제(OS) 개발에 욕심이 있었다. 컴퓨터 국산화를 제대로 하려면 OS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 교수가 KAIST 교수로 부임했을 때 전세계에서 이른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이 불었다.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공개하고 라이선스를 무료로 하자는 운동이었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에는 MIT 연구원이었던 ‘리처드 스톨만’이 있었다. 전 교수는 그와 우연한 기회에 친해졌고 유닉스를 오픈소스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전 교수 연구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한 제자가 함께 도전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제자가 벤처 창업을 선언했다. 전 교수는 평소 박사 학위 취득보다 벤처 기업 창업을 더 장려했다. 국가에서 돈을 받고 공부하는 KAIST 학생들은 대학교수처럼 평범한 일보다 스스로 기업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제자에게 창업에 대한 영감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것이다.

결국 유닉스 오픈소스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전 교수보다 조금 늦게 개발을 시작한 오픈소스가 핀란드에서 등장했다. 바로 리눅스의 탄생이었다.

그가 바랐던 오픈소스 OS 개발에는 비록 좌절했지만 제자들이 걸출한 벤처인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이다. 한 제자는 전 교수의 연구실을 이렇게 회고한다.

“전길남 박사님의 연구실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실이었고 혹독한 연구실이었지만, 연구실 출신 제자들이 어떻게 많은 기업을 창업했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로를 바꾸기가 정말 어렵지만, 전길남 박사 연구실에서는 중간에 편하게 그만둘 수 있었다. 앙금이 생기거나 갈등이 생길 수가 있었지만, 전 박사님은 달랐다. 전 박사님은 그래 나가고 싶어? 그래 나가봐봐.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