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하이텍은 지난해 창립 18년 만에 순이익 기준 첫 흑자(1267억원)를 냈다. 올해도 순풍이 불고 있다. 올해 1분기(1~3월) 영업이익은 407억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12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이 22.1%로 1년 사이 두배로 높아졌다. 증권가에선 동부하이텍이 올해도 연간 흑자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동부하이텍은 국내 유일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다. 파운드리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로부터 주문받은 반도체를 생산해 공급하는 사업을 말한다. 동부그룹의 ‘미운오리'였던 동부하이텍의 실적 개선을 이끄는 건 아날로그 반도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TV 등에 탑재되는 전력반도체, 터치스크린칩, 이미지센서, 디스플레이구동칩 등 아날로그 반도체의 주문이 늘면서 공장 가동률이 93%까지 높아졌다. 경기 부천과 충북 음성에 자리잡은 동부하이텍 2개의 공장에서는 매월 200mm(8인치) 웨이퍼 9만6000장 분량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축구장 2개 반을 채울 수 있는 수준이다. 2000년대 중반 가동률이 60%에 그쳐 존폐 위기에 내몰렸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동부하이텍은 고객의 주문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제품 다변화 전략을 통해 2000년대 중반 80여개였던 고객사를 지난해 150여개로 늘렸다. 지속적인 재무구조 개선 활동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최근에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모바일결제솔루션 삼성페이를 지원하는 마그네틱보안전송(MST) 칩 양산도 맡았다.
동부하이텍 관계자는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를 주로 다루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경우 초미세 공정을 통한 대량생산이 원가 경쟁력의 핵심이지만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인 아날로그 반도체의 경우 미세화 공정보다는 설계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누가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는지가 아날로그 반도체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 ‘뜨고 있는’ 아날로그 반도체, 빛·소리·압력·온도 등 아날로그 신호 처리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뉘고, 시스템 반도체는 다시 디지털 반도체와 아날로그 반도체로 구분된다. 디지털 반도체는 디지털 신호인 0과 1을 연산 처리해 시스템의 기능을 제어하는 반도체를 말한다. PC와 스마트폰에서 사람의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중앙처리장치(CPU)가 대표적인 디지털 반도체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빛·소리·압력·온도 등 아날로그 신호를 IT기기가 인식할 수 있도록 디지털 신호로 바꾸거나, IT기기가 처리한 결과 값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스마트폰 카메라 모듈에 사용되는 이미지센서(CIS)와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 전원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전력관리칩, 화면을 터치하면 해당 기능이 실행되는 구동칩 등이 대표적인 아날로그 반도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소방차의 사진을 찍을 때, 빛을 통해 이미지 센서에 전달되는 소방차의 빨간색은 파장 형태의 아날로그 정보다. 스마트폰의 두뇌인 AP는 이 정보를 읽을 수 없다. AP는 0과 1의 디지털 신호만 인식할 수 있다. 이미지 센서가 이 정보를 읽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 센서는 입력된 빨간색의 아날로그 정보를 ‘111111110000000000000000’이라는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AP에 전달한다. 컴퓨터는 색상의 입·출력을 위해 일종의 약속인 16진수 RGB 코드를 갖고 있다. 빨간색의 코드명은 ‘FF0000’이다. 이를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2진수로 변환하면 111111110000000000000000이 된다.
스마트폰의 조명 기능을 ‘자동’으로 설정하면 주변의 밝기에 따라 화면의 밝은 정도가 바뀐다. 전력반도체가 이 기능을 담당한다. 전력반도체를 사용하면 소비전력을 30%이상 줄일 수 있다.
소리, 빛 등 다양한 기능의 질적 수준이 제품 판매 실적을 좌우하면서 아날로그 반도체의 사용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현재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반도체 가운데 약 60% 가량이 아날로그 반도체다. 애플 아이폰5에 사용된 총 22개의 반도체 중 19종이 아날로그 반도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IHS에 따르면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 519억 달러(약 61조810억원)에서 2019년 609달러(약 72조5379억원)로 17%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사무국장(상무)은 “최근 IT기기의 성패는 시각(카메라), 촉각(터치), 청각(소리) 등 아날로그 감성을 얼마나 잘 구현하는지에 달렸다”며 “동부하이텍이 아날로그 반도체로 사업을 빠르게 재편한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 동부하이텍, 아날로그 반도체가 가져다준 기회
동부하이텍의 상황은 출발부터 암울했다. 이 회사는 1997년 설립 당시 256메가바이트(MB) D램을 중심으로 한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모든 계획은 올스톱됐다.
동부하이텍은 2000년에 사업 방향을 메모리 반도체에서 파운드리로 바꿨다. 그러나
9.11테러와 IT 거품 붕괴로 반도체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공장 가동률은 40% 이하로 떨어졌다. 대만 TSMC, UMC 등 선발 파운드리 업체들의 기술력과 생산원가 격차를 따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제조사 조차 동부하이텍이 아닌 대만 업체들과 손을 잡았다.
동부하이텍은 2007년부터 아날로그 반도체에 초점을 맞췄다. 가전과 IT기기, 자동차 등에 센서 사용이 늘고 저전력이 제품의 경쟁력으로 꼽히면서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다.
게다가 아날로그 반도체는 선두업체에 비해 공정기술이 뒤떨어지는 동부하이텍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날로그 반도체의 경우 초미세 공정을 이용해 칩을 너무 작게 만들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애플 아이폰에 들어있는 지문인식 반도체는 엄지손가락 첫마디 만하다. 또 아날로그 반도체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제품의 크기가 제각각이다보니 자투리가 적게 나오는 8인치 웨이퍼의 생산효율이 더 높다. ‘8인치 웨이퍼 공정은 경쟁력이 없고 12인치 웨이퍼 시대로 넘어갈 것이다’라는 종전의 전망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동안 만성적자에 빠졌던 동부하이텍은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동부하이텍은 2001년 도입한 미크론(100만분의 1미터)과 8인치(200mm) 웨이퍼 등의 설비와 기술을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삼성전자, TSMC 등 선진 반도체 업체들은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선폭(線幅)과 12인치 웨이퍼(300mm) 등 최첨단 공정기술을 갖고 있다.
최도연 교보증권 연구원은 “스마트폰, IoT, 초고화질(UHD), 발광다이오드(OLED), 결제 등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의 급성장이 8인치 웨이터 기술을 보유한 동부하이텍으로선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며 “동부하이텍은 올해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달성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최 연구원은 동부하이텍의 올해 영업이익을 지난해보다 37.4% 늘어난 1717억원으로 추정했다.
◆ 갈길 먼 韓 아날로그 반도체…미국·EU·일본이 ‘장악’ 중국 ‘추격'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이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미국), ST마이크로(스위스), 인피니언(독일), 아날로그디바이스(미국), 도시바(일본) 등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과 EU는 자동차·모바일 반도체 시장에서 강하고 일본은 소비자 전용 반도체 시장에서 앞서 있다. 한국은 D램 등 메모리 반도체에 ‘올인’하느라 아날로그 반도체 등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는 소홀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2% 미만 수준”이라며 “국내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의 97%(약 7조원)를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중국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산업 발전기금을 마련해 2026년까지 1조 위안(약 175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쏟아붓기로 했다. 이미 중국은 발전기금을 통해 파운드리,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패키징·테스팅(P/T) 등 가릴 것 없이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걸쳐 활발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반도체 발전기금을 운용하는 강서연창규곡 펀드는 국내 반도체 기업인 멜파스의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멜파스는 터치디스플레이 직접회로(IC)와 터치스크린 모듈 관련 180여 개의 기술특허를 보유한 아날로그 반도체 전문기업이다.
중국 최대 반도체 설계회사인 칭화유니그룹은 지난해 대만의 반도체 설계 기업 파워텍 지분 25%를 6억 달러(약 6800억원)에 인수했다. 파워텍은 세계 최대 반도체 칩 패키징 회사 중 하나로 꼽힌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중국이 막대한 자금력과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다”며 “정부의 정책, 기업의 투자 및 개발, 우수 인재 양성 등 삼박자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국이 아날로그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