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함을 깨느라 흔히 던지는 질문 중에 '혈액형'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많은 사람이 혈액형을 알면 상대방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사람 혈액형은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일까. '혈액형별 성격'의 역사는 100년 전 독일에서 시작됐다. 당시 독일에서는 독일인이 태생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근거를 찾는 우생학(優生學)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다.

1919년 독일 학자 루트비히 힐슈펠트는 '인종별 혈액 차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A형이 B형의 두 배가 넘었다. 반면 흑인, 베트남인, 인도인 등은 B형이 더 많았다. 힐슈펠트는 이를 근거로,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B형보다 많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에 있던 일본 철학 강사 후루카와 다케지는 힐슈펠트의 연구 결과를 본 뒤 주변 사람 319명을 조사해 '혈액에 따른 기질 연구'라는 글을 썼다. 다케지는 "혈액형이 다르면 성격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일본 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다케지의 글을 기초로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혈액형에 따라 몸의 구성 물질이 다르고, 이것이 체질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비(非)과학적 내용이었지만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혈액형에 맞는 음식, 옷, 교육법까지 유행했다. 이 유행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현재의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00년 전의 비전문가가 불과 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혈액형에 열광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이는 두 나라 혈액형이 전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ABO식이기 때문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A형이 34%, O형이 28%, B형이 27%를 차지한다. 일본은 A형 37%, O형 31%, B형 22% 정도다. 확률적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AB형을 제외하면 혈액형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

반면 프랑스는 A형이 44%, O형이 42%이고 미국은 A형이 40%, O형이 45%이다. 프랑스나 미국에서는 사람이 대부분 A형과 O형인 만큼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구분할 여지가 많지 않다. A형이 실제로 소심하다면, 프랑스와 미국에는 한국보다 소심한 사람이 많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혈액형별 성격은 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바넘 효과' 때문으로 분석한다. 바넘 효과는 일반적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하고, 싫어하는 일은 회피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혈액형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면 유전적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유전자와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연관이 있어야 하지만, 두 유전자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혈액형과 성격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연구할 가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