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날카로운 기계 소리가 들린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철강 자재가 수북이 쌓인 건물들 사이로 벽화와 조형물이 눈에 띈다. 철공소와 북카페가 ‘한집살이’를 하는 건물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거리’다.
◆ 산업화 붐 타고 철공단지로 탈바꿈
문래동 철공소 거리는 원래 주거지역이었다. 1960년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서울 영등포구 일대가 산업단지로 개발되면서 문래동에 철공소와 철강 자재 점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존 주택도 공장과 점포로 개조하면서 점차 ‘문래 철공단지’의 모습을 갖췄다.
40여년 간 문래동에서 철공소를 운영해온 박양동(60) 씨는 “청계천에서 작은 사업을 하다 청계천 개발이 시작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며 “당시 청계천에서 전용면적 3~6㎡ 점포를 마련할 돈이면 문래동에선 전용 33㎡짜리 점포를 살 수 있어 많은 철공업자가 이리 몰려들었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 지역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 철강 자재를 공급하고 제조하는 중심지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수천개의 공장이 밀집했다. 박양동 씨는 “당시에는 철재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가 종일 줄을 서기 일쑤였고, 자정까지 기계가 돌아가는 곳도 많았다”고 말했다.
◆ 중국산 제품 공습·산업구조 변동에 침체
문래동 철공단지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래동에 이어 반월, 시화 등 경기·인천 외곽 지역에 대단위 산업단지가 새로 조성된 데다 값싼 중국산 철강 제품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산업구조의 중심축이 서비스·IT로 옮겨간 것도 타격이었다.
손길배(55) 문래동 소공인지회 지회장은 “1980년대 말 대형 사업체 10% 정도가 다른 산업단지로 빠져나갔고, 자본력이 부족한 소규모 철공업자(소공인)만 남아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일대 부동산 가격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래동 철공소 거리 인근에서 15년 간 중개업을 해온 W부동산 대표는 “80년대에는 이 지역 땅값이 3.3㎡당 1000만원까지 올랐지만, IMF 직후에는 땅값이 30%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지금은 이런저런 개발 호재들 때문에 주변 땅값이 3.3㎡당 1200만~3000만원을 호가한다.
◆ 젊은 예술가 속속 입주…소공인들도 재기 노력
활력을 잃어가던 문래동 철공소 거리는 2000년 이후 홍대와 신촌 지역에 거주하던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홍대와 신촌 지역의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이 문래동으로 옮겨오면서 골목 곳곳은 형형색색의 벽화로 채워졌고, 이내 ‘예술촌’이 형성됐다. 식당과 카페도 자리를 잡으면서 철공소 거리가 예술 골목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2008년부터 문래동에서 활동 중인 작가 송호철(46)씨는 “임차비도 낮고 작가들 간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어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송 씨가 문래동에 마련한 전용면적 45㎡ 작업실(2층)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가 30만원이다. 마포구 서교동 일대에서 비슷한 면적의 작업실을 구하려면 보증금 1000만~3000만원에 월세 80만~130만원 정도 줘야 한다.
소공인들도 팔을 걷어 부쳤다. 자체적으로 문래소공인지회를 만들고 협업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외부의 지원도 늘어났다. 지난해 중소기업청 주도로 ‘문래소공인특화지원센터’가 설립됐는데, 센터는 ‘소공인 경영대학’을 무료로 개설해 소공인들이 경영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8년 전부터 문래동에서 철공소를 운영한 한부영(48) 씨는 “수십년 간 쌓인 문래동의 기술력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지만, 시설이 낙후하고 경영 지식이 부족해 그동안 발전에 제약이 많았다”며 “지원센터 교육을 계기로 최근 새로운 기계를 들여오거나 기술적으로 협력해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 복합단지 개발 복병?… “기술력 보존 방안 시급”
문래동의 미래가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서울시가 지난달 내놓은 ‘준공업지역 재생과 활성화 방안’에 따라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복합단지 등 각종 개발사업이 시작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면 문래동 철공소들은 최소 2~3년은 이곳에서 영업을 할 수 없어 곳곳으로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 철공업자들은 문래동이 쌓아온 기술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손길배 지회장은 “낙후된 시설이 많아 개발이 필요하긴 하다”면서도 “소공인들의 생존권 문제도 있지만, 기술력이 흩어지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발 이전에 문래동 철공단지의 집약적인 기술력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우선 마련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