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놈 출신이고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내내 고생했다. 작은형이 자살한 이후 어머니의 유일한 꿈은 내가 잘되는 것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를 악물면서 ‘너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내 성장 과정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었다.” (우상호 ‘촌놈-어느 386세대의 성장 보고서’ 중에서)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부의장.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앞에는 늘 ‘386세대의 맏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도 그럴것이 우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 회장이던 1987년, 26살의 나이에 6월 항쟁을 이끌었다.

우 의원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인을 꿈꿨다. 가족의 뜻과 달리 연세대 상대가 아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1986년 오월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며 예비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기자의 기억 속에는 2012년 3월 어느 날, 19대 총선을 앞두고 연희동 골목길에서 ‘아줌마 부대’를 끌고 다니며 선거 유세를 하던 우 의원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우 의원의 곱상한 외모 때문인지 당시 40~50대 여성 유권자들은 까치발을 들고 그의 실물을 구경하기 바빴다.

여기다 우 의원은 정치인 특유의 친화력을 지녔다. 눈이 마주칠 때면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눈으로 웃는다. 대학 진학 당시 목표였던 여고 국어 선생님이 됐다면, 수많은 여고생들의 첫사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우 의원에겐 반전이 있다. 고생 한번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유년기는 가난과 함께 했다. 대학 등록금 60만원이 없어 어머니가 친척집을 돌며 그의 학비를 마련했고, 우 의원은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사판에서 일일 근로자로 일한 것은 물론 보리차, 고무장갑도 팔았다.

우상호 의원의 초등학교 시절

우 의원의 고향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 ‘백마고지전투’로 유명한 강원도 철원.

본래 우 의원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1916년 강원 철원 지역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춘천고를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 제국대학 체육학과에 유학을 다녀왔다. 하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철원은 북한 치하로 들어갔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노동당에 땅을 헌납하고 소학교 체육 선생을 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월남한 뒤 휴전이 되자 서울에서 중매로 어머니와 결혼하고 철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 의원의 아버지는 되찾은 땅을 팔아 학교 건물을 지어 국가에 헌납했다. 그 때문인지 공화당 초기 시절 강원도 교육위원회 위원이 됐지만,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고 땅을 팔아 생계를 유지 했다. 3남1녀의 막내인 우 의원이 태어난 1962년에는 집 한 채만 남아있었다. 이후 어머니가 보건소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우 의원의 큰형, 누나, 작은형 모두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차례대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우 의원은 중학교 시절 납부금을 독촉하는 종례 시간마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우 의원은 “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보낼테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어머니의 바람 덕분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 살림을 맡은 어머니의 고단함을 보고 자라서인지 우 의원은 사회 문제에 대해선 일부러 거리를 뒀다. 우 의원은 자신을 “회색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던 소시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군 제대 이후인 1985년 ‘국문과 84 강타’라는 가명으로 뒤늦게 시작한 학생 운동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1987년 3월 연세대 학생회장 선거 출마 당시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3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 당한 사건이다. 1962년생에게 박정희란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대통령이었다.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고 그 일을 계기로 정치와 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둘째는 내 인생의 변곡점인 1987년 6월 항쟁이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만 해도 이렇게 규모가 커질 지 몰랐다. 6월 항쟁을 주도했지만 시위 규모가 커지면서 두렵기도 했다. 흥분과 불안이 교차했다.

셋째는 개인적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어디에서 나고 자랐나

“사람들은 내가 도회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며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다. 내성적인 아이였다.”

-유년시절은 어땠나

“솔직하게 말해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가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와서 어머니와 다투셨다. 아버지는 인물도 좋으셨고 공부도 많이 한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남과 북의 대결구도에서 방황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 세대는 격랑의 역사 속에서 혼란과 충격, 고통과 좌절의 20~30대를 보냈을 거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해서 아쉽지만 나는 아버지 세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생계는 누가 담당했나

“집안 재산이 집 한 채 정도 남은 이후로 어머니가 보건소에서 가족 계획 담당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형과 나, 어머니는 서울로 오고 아버지와 누나, 작은형은 철원에 남았다. 어머니가 미대에 가고 싶어하는 큰형의 바람을 이뤄주려고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서 보세 가공업을 시작했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되고 우리나라와 일본 외교 갈등이 첨예해졌다. 덩달아 일본을 상대로 한 보세 산업이 타격을 입었고 큰형의 대학 진학 꿈은 멀어졌다. 결국 큰형은 입대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가 서울에서 취직을 해 작은형과 나를 부양하고 어머니는 철원으로 돌아가 농협에 취직을 했다. 작은형은 1978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고에 갔다.”

-시는 언제부터 썼나

“보문동 산꼭대기에 있던 용문고등학교에서 치른 첫 시험에서 수학 20점을 맞았고, 반에서 20등 밑으로 떨어졌다. 어머니를 졸라서 독서실에 다니기 시작했고 성적이 올라갔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소설책을 읽거나 공상을 했다. 밤새워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글쓰기 재능도 인정을 받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문예반을 선택했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기형도, 공지형 등이 활동하던 연세문학회에 가입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인 1986년에 오월 문학상 시 부문,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대학생 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1987년 6·10 항쟁 당시 우상호 의원은 연대 학생회장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했나

“대학 때 가장 큰 고민은 가난이었다. 정서적으로 찌들어 살았다. 대학 때 책 한 권을 사려면 오랫동안 돈을 모아야했다. 대학 때 소주 한 병이 250원이었는데 서클 활동을 하면 1000원씩 내야했다. 가난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고, 옷은 2~3벌 밖에 없었다. 등록금이 60만원이었는데 어머니 수중에 있던 돈이 10만원이라 대학 입학을 포기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친척집에 도움을 요청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반값등록금이란 이슈는 남다르다. 등록금이 얼마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 안다.”

-학생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한건가

“대학교 1~2학년 때는 문학도로 비운동권이었다. 물론 문학회 생활을 하면서 같은 과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는 있었고 여러번 제안을 받았지만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당시 문학회 동료 중 박래군의 추천으로 세미나도 함께 했다. 교재는 조세희, 황석영 소설이나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역사서였다. 그때까지도 나의 인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회색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는 소시민이었다.”

-그럼 무엇이 계기였나

“군대에 있을 때 1985년 2월 12일 선거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어용 야당이라는 민한당이나 국민당과 달리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해 만든 신한민주당이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 1주일 전부터 중대장이 ‘야당 찍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정신 교육을 시작했다. 기표소가 중대장실이었는데 투표를 처음하는 병사가 많아서 지도 명목으로 중대장이 배석하고 있었다. 중대장 테이블에 투표용지를 놓고 인주를 찍는 방식이었는데, 야당을 찍었다. 그랬더니 ‘우 병장 그렇게 교육을 시켰는데 야당을 찍어? 까불고 있다’라고 협박을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연대장이 불려가서 술먹고 돈먹고 조직선거를 하는 현실을 보고 구조적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학생 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복학하고 바로 시작한건가

“학생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1985년 2학기 복학을 했지만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다. 2년 후배 중에 월간 ‘말’ 기자를 거쳐서 오마이뉴스대표로 있는 오연호가 있다. 오연호의 소개로 84학번 세미나팀에 들어갔지만 후배들이 부담스러워할 거 같아서 ‘국문과 84 강타’로 속였다. 당시 세미나에선 가명을 사용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셨나

“부모님께는 물론 얘기하지 않았다. 연희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1986년 4·19혁명 기념일 가두시위에서 쓰려고 화염병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경찰이 많아서 화염병을 쓸 수 없었다. 점심을 굶어가며 만든 것이라 집으로 가져왔다. 예고없이 어머니가 자취방에 와 계셨다. 집 뒤 구석에 숨겼지만 어머니가 눈치 채셨다. 그리고는 절대 가담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계속 학생운동을 몰래 한건가

“걱정하지 마시라고 돌려보냈지만 그때부터 어머니의 불안이 시작되긴 했다. 시위에서 잡힌 적이 없어서 들통나진 않았고, 학생회장 출마하면서 운동권이 맞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대장을 한다고 봐주시더라.”

-1987년 6월 항쟁은 어떻게 조직된건가

“학생회장이 된 이후인 1987년 4월 전두환 정부가 개헌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4·13 호헌선언이었다. 개헌을 주장하던 야당, 재야단체, 학생 운동 진영은 민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전당대회일인 6월 10일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계획한다. 서울시내 대학 40여개 중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 운동권인 10여개 대학과 비운동권 대학을 모았다. 또한 대중적 참여를 제한시키지 말자는 의미에서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을 만들었다.”

-당시 얼마나 모였나

“사전에 학교별로 가두시위에 동원할 수 있는 대학생 수는 1만5000명으로 조사됐다. 보통 사전 집계를 할 때 과장이 있기 마련이니 1만명 정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6월 10일 총궐기는 학생 중심이었고 일부 노동자 단체만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집회를 시작한 지 1시간30분이 지난 오후 7시 신세계 분수 광장에 2만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그 중에서 밤늦게까지 거리에 있던 수백명의 시위대는 경찰에 쫓겨 명동 성당에 갇히고 다음 궐기 날짜를 6월 18일로 정했다.”

1991년 결혼식 때. 우상호 의원은 연기자 안내상씨와 신혼셋방에서 함께 살았다.

-시위를 기획한 사람인데 기분이 어땠나

“불안했다. 대부분의 학생회장은 22~23살이었다. 내가 그나마 나이가 많았다. 언제까지 시위를 끌고 가야할지,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도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모두들 극도로 긴장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7년 감옥에 갔다.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전대협 학생운동 그룹이 1988년 감옥에서 나온 이후 ‘계룡산악회’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향후 10년간 빛나는 자리에 가지 말기로 결의했다. 지역을 떠나지 말고, 재야시민단체에서 공적인 활동을 하고, 주기적으로 만나 점검하기로 했다.”

-1991년에 결혼했는데, 경제생활을 어떻게 했나

“청년단체에 가서 새로운 형태의 청년운동을 했다. 나 대신 아내가 돈을 벌었다. 그 무렵 출판사를 하고 있던 후배가 인수비용 없이 출판사를 넘겼다. 두리출판사라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데 일주일의 반은 운동권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출판사에서 일했다. 출판사를 3년 경영했는데 책이 안 팔려서 힘들었다. 그때 생각하면 직원 5명 이상 고용하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반대는 없었나

“당연히 반대가 심했다. 재야단체에 있을 때라 월급이 10~20만원이었다. 장인 어른의 표현으로는 내가 ‘데모 대장’이었다. 생계를 딸이 책임질게 뻔한데 누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지금은 장인 어른이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거처는 성북구지만 나의 지역구인 서대문구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신다.”

-아버지 우상호는 어떤 사람인가

“22살, 20살인 아들 둘과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있다. 재야 활동을 할 때 언제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돌이켜보니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다. 바깥 일만 주로 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대신 딸과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편이라 아들들이 항의한다. 그럴 때마다 ‘딸이잖아’라고 한다.”

-현재 경제상황은 어떤가

“17대 국회의원 중에서 재산 순위가 뒤에서 10등이었다.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지 물욕은 없다.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했기 때문에 가치를 중시하도록 훈련된 듯 하다.”

우상호 의원은 수감생활 후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재야 운동가로 살았다.

-1962년생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386세대는 문명의 경계에 섰던 경계인이다. 농촌 출신이 70%인 마지막 농경 세대이자 첫번째 정보화 세대다. 또한 독재에서 민주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지켜본 세대다. 때문에 여러가지 가치가 혼재된 세대이기도 하다. 농촌 출신이라서 보수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으면서도 민주화를 겪으며 일시적으로 진보의 경험을 맛봤다. 물론 정보화 세대의 첫세대로서 새로운 문명과 소통에 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1962년생들과 나누고 싶은 가치가 있나

“사회적 기업, 사회적 단위를 만들어 보고 싶다. 은행 지점장 출신도 은퇴하면 2~3년 휴식을 취한 뒤에 자영업에 뛰어든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영업의 30~40%는 실패한다. 대신 은행 지점장 출신이면 은퇴 뒤에 전문성을 살려 사회적 금융기관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은퇴 경찰관이 학교 보안관이 되면 학원 폭력도 막고, 국가에도 기여하고 본인의 행복도도 높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전문성을 살린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싶나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면 높은 곳에 갈 수도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정치를 그만두고 정말 하고 싶었던 시인으로 살고 싶다. 지금 도종환, 유은혜 의원과 ‘시 읽는 의원들의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기에 정계은퇴가 두렵지 않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고 싶나

“정치를 그만둔다고 해도 우리세대를 중심으로 60~70살까지 멋지게 살 수 있는 집단을 설계하고 싶다. 또한 시를 쓰고, 정치학교를 만들어서 후진을 양성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