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곱창'을 즐겨 먹는다. 한 달에 대여섯 번은 회사 근처 양곱창집에 들른다. 그 순간만큼은 일 생각을 잠시 접어놓는다. 넥타이 풀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부딪친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양곱창을 양파·마늘·부추와 함께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간다.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양곱창을 먹으며 컸다. 재일교포 2세인 어머니가 일본 나고야에서 양곱창 음식점을 하셨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양곱창이 비싸고 귀한 음식이지만 1960~1970년대 일본에서 양곱창은 버리는 부위였다. 소의 내장은 냄새 나고 더러워 먹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어머니는 소 도축장에서 버리는 양곱창을 가져와 깨끗이 손질해 한인이나 건설 현장 노동자들에게 팔았다.
과거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은 극심했다. 한인들은 쓸 만한 일자리를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5남매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는 건축업 등 여러 분야에서 사업을 벌였지만 신통치 않았다. 어머니가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식당을 차리기로 했다. 돈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내린 어머니의 결정은 지혜로웠다. 일본에서는 원가가 제로에 가까운 양곱창 음식점을 차리기로 한 것이다. 재일교포 가정에서는 양곱창을 가끔 해먹었지만, 일본 사회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식당은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한인, 현지 서민들을 대상으로 일반 고기보다 훨씬 싸게 즐길 수 있는 양곱창 음식점을 차리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10평 남짓한 크기인 어머니의 식당은 금세 지역 명물이 됐다. 손님은 한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적지 않은 일본인이 소문을 듣고 식당을 찾았다.
식당 일이 바쁘다 보니 어린 시절 어머니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와 동이 트기 전 집을 나섰다. 도축장에서 양곱창을 받아와서 손질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5남매의 도시락을 정성껏 싸놓고 일을 나가셨다. 철없을 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때 어머니가 감내하셔야 했을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살림살이가 빠듯하다 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직접 용돈을 벌어 썼다. 11세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어린 나이에 키가 175㎝나 될 정도로 덩치가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 악물고 맡은 것 이상을 해내며 "일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재일교포로서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던 게 아닌가 싶다. 부모님은 수시로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인의 긍지를 갖고 일본인에게 결코 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일찌감치 사회에 발을 들이면서 장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장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대학 졸업장은 받으라"고 하신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에 갔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공부보다는 돈 버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막노동을 꾸준히 했고, 건강용품을 방문 판매하는 일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985년에는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3년여의 준비 끝에 1988년 나고야에 '신라관'이라는 300석 규모의 대형 음식점을 차렸다. 신라관은 양곱창뿐 아니라 갈비, 불고기 등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파는 음식점이다. 신라관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나고야에서 유명한 음식점이 됐다.
신라관의 성공을 바탕으로 나는 조국인 한국에서 사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채라는 오명을 쓰고 사회적 지탄을 받던 고리대금업 시장이었다. 나는 서민들에게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이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며 제대로 정착돼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러시앤캐시라는 브랜드로 이 분야에 뛰어들어 판을 키우면서 한국 대부업 시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양곱창이 어머니를 비롯한 재일교포 1·2세들의 손을 거쳐 일본의 대표적인 구이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과정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양곱창과 나의 대부업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알려주신 양곱창의 혜안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최윤 회장은]
OK저축은행·러시앤캐시 등이 속한 아프로서비스그룹 최윤 회장은 1963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 3세다. 최 회장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최 회장 가족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다. 최 회장은 2002년 대부업체인 '원캐싱'을 세우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2004년 일본 대부업체 A&O 인터내셔널을 인수해 '러시앤캐시' 브랜드를 만들었다. 작년에는 예주·예나래 저축은행을 인수해 OK저축은행을 출범시켰다.'OK'는 '진짜 한국인(Original Korean)'이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