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조선 시대에는 흰 쌀밥이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양반인 이(李) 씨들만 먹는 밥이라 하여 '이밥'이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는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는 양천제였으나 실제로는 반상제라 하여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이중 농민은 사실상 상민이 되어 천민과 함께 피지배계층에 속했습니다. 그러니 양반을 제외하면 모두가 풍족치 못한 생활을 하는 서민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이팝나무는 양반들만 먹는 쌀밥 같은 꽃을 피우는 나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팝나무가 양반들의 나무인 것은 아닙니다. ‘이밥’에서 온 이름이니 양반들이 이름 지었을 리 없는 이름이므로 이팝나무는 서민들의 나무가 분명합니다. 절기상 입하(立夏) 즈음에 핀다는 뜻의 입하목(立夏木)이 변해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은 지나치게 현대어적으로 지어낸 듯해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았던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던 서울시 청량리동 홍릉수목원에는 거대한 이팝나무가 자랍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지마다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특유의 구수한 향기를 날립니다. 둘레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앞쪽의 본관동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키가 크고 장대한 수형을 자랑합니다. 관람객들을 매료시키던 활엽수원 쪽의 진분홍색 만첩풀또기가 지고 나면 바로 이 이팝나무가 단골 기념촬영장소가 되어줍니다.
전국에는 천연기념물 이팝나무가 일곱 그루 있는데, 그 중에는 전북 고창군 중산리 이팝나무처럼 규모가 작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비한다면 홍릉수목원의 이팝나무도 거의 천연기념물 급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들은 모두 남부지방에 몰려 있습니다. 특히 평야나 농경지가 발달한 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흉을 점치는 신목으로 대접 받아 주로 농경지 주변에 심어 온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꽃이 잘 핀 해에는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식의 믿음은 우리 민족이 거쳐 온 농경사회가 낳은 산물 중 하나입니다.
천연기념물이 많다고 해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에 견줄 만한 장수목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의 수령이 250~600년 정도인 점만 봐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의 현재 수세를 예전과 비교해 보면 매우 나빠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내일하는 이팝나무들은 해마다 발생하는 태풍이나 낙뢰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팝나무의 꽃이 고봉으로 수북이 담아놓은 쌀밥처럼 보인다는 것은 멀리서 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꽃잎이 바람개비처럼 4갈래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꽃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경우에는 꽃잎이라는 용어 대신 ‘화관(花冠)’ 또는 ‘꽃부리’라는 개념의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보통 ‘화관이 4갈래로 갈라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와 비슷한 구조의 꽃으로 개나리, 미선나무, 라일락, 쥐똥나무 등이 있으니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들 모두 화관이 4갈래로 갈라지고 ‘물푸레나무과’에 속한 나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명(科名)으로 쓰이는 물푸레나무는 정작 화관 없이 암술과 수술로 된 꽃이 피지만 말입니다. 개나리와 몇몇 나무를 제외하면 다들 향기가 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팝나무는 공해와 병충해에 강한 편이라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지다 보니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팝나무에 성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이팝나무는 가을에 쥐똥나무 열매보다 커다란 타원형의 열매가 달립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열매가 하나도 달리지 않는 나무도 있습니다. 열매가 달리지 않는 건 당연히 수그루입니다.
열매가 달리는 건 암그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암그루라고 알려진 나무에 피는 꽃은 씨방 부분이 부풀어 있어서 암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암꽃으로 간주하기에는 수술이 너무나도 온전해 보입니다. 암꽃이라 하면 대개 암술만 있고 수술이 없거나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수술이 성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꽃이어야 암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팝나무의 암꽃으로 알려진 꽃은 분명히 수술이 성숙해 있고 꽃가루도 날리므로 암꽃이 아니라 양성화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팝나무의 성별은 암수딴그루가 아니라 수꽃양성화딴그루라고 하는, 약간은 복잡한 개념의 꽃이 피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렇듯 식물의 세계는 우리가 미처 밝혀내지 못한, 또는 잘못 밝혀낸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제대로 잘 밝혀냈다 하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도감에 반영되지 못한 사실도 많고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여러분도 느껴보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