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중요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선택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갑니다. 인터넷 환경이 발달하면서 검색만 하면 웬만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정보량이 방대하다 보니 그 속에서 올바른 정보만 골라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 의해 재생산된 정보의 정확성은 항상 검증해 보아야 안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특히 식물 쪽은 더욱 그러합니다.

보리수라 불리는 나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인터넷에 보리수에 대한 자료는 넘쳐 납니다. 하지만 워낙 복잡한 이야깃거리가 얽혀 있다 보니 잘못 게재된 정보가 많아 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정확하게 알려드릴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보리수라는 이름의 나무는 네 다섯 가지로 추릴 수 있습니다.
(1)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장소의 보리수
(2) 슈베르트 가곡에 나오는 보리수
(3) 우리나라에서 자라며 빨간 열매를 맺는 보리수나무
그리고 이름은 좀 다르지만, 생김새가 비슷한 보리자나무(4)와 찰피나무(5)도 함께 다뤄야 합니다.

먼저 부처님과 관련된 보리수는 뽕나뭇과의 상록활엽수로, 인도보리수(학명 Ficus religiosa)라고 합니다.

인도보리수의 잎(금강수목원)

상록활엽수라는 말은 잎이 넓으면서도 겨울에 낙엽이 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도보리수는 잎이 무척 두껍고 넓어 고무나무 같으며 인도처럼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열대성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후가 맞지 않아 월동하지 못하기에 식물원이나 수목원의 온실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워낙 흔하다 보니 부처님이 그 나무 밑으로 가서 수행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우연한 일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나무이고,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자로 음역하여 보리수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보리수’라는 이름에 비밀 아닌 비밀이 있어 오늘날 이 같은 혼란의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사실 ‘보리’라는 음에 맞는 한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원래 한자는 ‘보제(菩提)’이기 때문입니다. 쓰기는 ‘보제’라고 쓰되 읽기는 ‘보리’라고 읽는 것입니다.

‘보제’는 불교의 근본이념인 ‘깨달음의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를 음역한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감이 좋지 않아 수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보리로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제수(菩提樹)’라고 해야 할 것을 ‘보리수’라고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 원래부터 있는 보리수나무(또는 보리수)와 혼동이 생기자 ‘인도보리수’라고 하여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보리수는 앞서 말했다시피 열대성 나무라 국내에서는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와 비슷하고 염주가 열리는 대용품 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와 사찰 주변에 심어 기르기 시작하면서 그 나무를 보리수라고 불렀습니다.

염주가 열리는 그 나무는 찰피나무(학명 Tilia mandshurica)라는 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인도의 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피나뭇과의 나무이고, 우리나라에 보리수나무라는 나무가 이미 있어 헷갈리므로 학자들은 그 나무를 ‘보리자나무(학명 Tilia miqueliana)’라고 불렀습니다.

보리자나무의 꽃과 잎

나무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스님들은 아직도 보리자나무를 부처님의 나무, 즉 인도보리수로 착각하곤 합니다. 중국이 원산지인 보리자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찰피나무와 외형상 거의 비슷해서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찰피나무의 꽃과 잎

찰피나무에 비해 보리자나무는 잎의 폭이 약간 좁고 가장자리의 톱니가 덜 날카롭지만 육안상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찰피나무의 열매는 달걀 모양 또는 구형인데 비해 보리자나무는 약간 납작한 점 정도가 그나마 식별 가능한 차이점입니다.

보리자나무의 열매(왼쪽)와 찰피나무의 열매(오른쪽)

그보다 더 쉬운 100% 구별법을 알려드릴까요? 산에서 만나면 찰피나무, 절에서 만나면 보리자나무입니다. 얼마 전에 문화재 소유권으로 인해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했던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에도 보리자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보리자나무

요컨대, ‘보제(菩提)’라는 용어의 좋지 않은 어감 때문에 ‘보리’라고 읽게 된 데에서 ‘보리수’의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혼란은 염주를 얻을 수 있는 보리자나무 역시 보리수로 부르게 했고, 보리자나무와 같은 피나뭇과의 다른 나라 나무의 이름을 번역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슈베르트의 유명한 가곡 ‘린덴바움(Der Linenbaum)’을 ‘보리수’라고 번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배운 그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는 사실 ‘유럽피나무(학명 Tilia europaea)’라고 하는 종입니다. 경기도 오산시 물향기수목원에 우물 없이 몇 그루 심어져 있습니다.

유럽피나무(물향기수목원)

물론 인도보리수하고는 아주 다르고, 보리자나무에 비해서도 잎과 열매가 작은 점이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보리자나무처럼 염주 같은 열매를 매다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낀 누군가가 린덴바움을 보리수라고 번역한 모양입니다.

그는 아마 불교신자이거나 피나무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도와 독일의 전혀 다른 두 나무가 우리나라에서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만나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이 혼란에 뜻하지 않게 일조를 한 건 우리나라에서 원래부터 자라고 있던 보리수나무입니다. 보리수나무(학명 Elaeagnus umbellata)는 봄에 은백색 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약간 떫은 듯한 단맛이 나는 작고 빨간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보리수나무의 꽃과 열매

보리수나뭇과의 나무로, 피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어릴 적에 ‘뽀루수’라고 해서 그 열매를 따먹은 기억이 있을 겁니다. 보리수나무라는 이름은 씨의 모양이 보리 같으니까 수(樹)자를 붙여서 지은 건데, 거기에 다시 ‘나무’를 중복시켜 동의어 반복을 한 모양새입니다.

보리수나무의 씨

역전을 역전앞이라고 하고 고목을 고목나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건 다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하려다가 생기는 현상입니다. 의미를 확실하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사찰에서 보리수라는 이름이 쓰이게 될 즈음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부처님의 보리수는 인도보리수로 하고, 빨간 열매를 맺는 우리의 보리수는 슈베르트의 보리수와 구별하기 위해 보리수나무로 부르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인도보리수, 보리수, 보리수나무, 보리자나무로 각각의 정확한 명칭을 쓴다면 혼란은 줄어들 것입니다.

이 정도가 보리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입니다. 유추한 부분도 있으므로 100% 정확하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그 어느 정보보다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