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증권사 41곳의 약 25%가 M&A(인수합병) 매물로 나와 있는 것으로 주간조선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이런 대량(大量) 매물은 IMF 외환위기 이후 15~16년 만의 일이다. 이는 증권사들의 경영 상황이 어렵다는 증거이다. 수면 아래에서 매각을 타진하는 업체까지 합하면 영업 중인 토종 증권사의 최대 40% 정도가 M&A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보인다.
간판이 바뀔지언정 M&A로 생존하거나 명맥이라도 이을 수 있는 증권사는 ‘행복하다’란 말까지 떠돌 정도다. M&A조차 불가능해 2013년 연말 결국, 스스로 청산을 결정하거나 파산이 확실시되는 증권사까지 등장했다.
올 초만 해도 자산 규모 8조원 이상 대형 증권사 중 M&A 매물은 우리투자증권(대표 김원규)과 KDB대우증권(사장 김기범) 둘뿐이었다.
이들 두 업체는 예금보험공사와 산업은행 등 사실상 정부가 주인이며, 자산 기준 업계 1위(우리투자증권)와 2위(KDB대우증권)다. 이 업체들은 M&A 시기가 계속 늦춰져 왔을 뿐 이미 수년 전부터 매각이 예정돼 있었다.
◇매물로 나온 증권사만 최소 10여개, 전체 증권사 가운데 25%가 '떨이 매물'로 나와 있어
올 9월 말 동양그룹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사태가 터지며 계열사의 부실 회사채를 불완전 판매해온 동양증권이 부실 증권사가 됐다. 동양증권은 자산 규모 8조7400억원인 업계 11위의 대형 증권사다. 결국 10월 중순 동양증권이 M&A 매물로 나왔다.
12월 1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가 동양증권 조기 매각을 허가하며 급하게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열흘 후인 12월 22일에는 현대그룹이 “현대증권(대표 윤경은)의 매각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현대증권은 자산 규모 18조9940억원짜리 업계 6위 대형 증권사다.
토종 증권사 중 자산 8조원 이상은 12개다. 이들의 자산을 합하면 206조6524억원이다.
현재 매물로 나온 우리투자증권, KDB대우증권, 동양증권, 현대증권, 네 증권사 자산을 합하면 84조614억원이 넘는다. 상위 12개 대형 증권사 중 이 네 증권사의 비중이 41%가 넘는다. 이 네 증권사의 매각 과정과 결과에 따라 증권업 시장 전체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2~3년 전부터 나와 있는 매물이 있다. 중소형 업체인 이트레이드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리딩투자증권, 애플투자증권이다. 11월 19일 이후 LIG투자증권과, 최근 460억원대 옵션거래 금융 사고를 일으켜 파산에 몰린 한맥투자증권이 매물이 됐다. 한국에서 영업 및 투자를 하고 있는 증권사는 토종과 외국계를 합쳐 62개다. 토종업체는 41개다. 41개 중 10개가 매각 대상이니 수로만 보면, 토종 증권사 4개 중 1개(25%)가 M&A 매물이다.
증권업 시장이 안정돼야 오랫동안 침체돼 있는 한국 자본·투자 시장의 회복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 나온 M&A 대상 증권사들의 새 주인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투자증권, KDB대우증권, 현대증권, 동양증권 등 대형사는 중소형 증권사보다 그나마 나은 형편이지만, 이 네 증권사조차 매수자를 찾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달 16일 우리투자증권의 M&A 본입찰이 있었다. KB금융지주, NH농협금융지주, 사모펀드인 파인스트리트 세 곳이 경쟁했다. 문제는 매각 가격과 적법성이다. 지금까지 금융권에서는 우리투자증권(우리아비바생명·우리저축은행, 우리자산운용 패키지 매각) 매각 가격이 1조2000억~1조5000억원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현재 이 정도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12월 16일 본입찰에서 KB금융지주, NH농협금융지주, 파인스트리트 세 곳은 예상가보다 낮은 약 1조원~1조1000억원대의 가격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금융지주와 우리투자증권 등의 매각이 수년 동안 지연됐던 가장 큰 이유가 ‘투입된 공적 자금 회수 극대화’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현재 인수 희망자들이 제시한 가격으로 매각하게 되면 ‘공적 자금 회수 극대화 원칙’을 정부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된다.
KDB대우증권은 아직 M&A 일정조차 못 잡았다. 특히 KDB산은지주 계열 KDB대우증권은 홍기택 회장이 금융을 잘 모르는, 대표적 정치권 낙하산 인사란 비판을 받고 있다. KDB대우증권의 M&A는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눈치까지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다. M&A를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이 혼란스럽고 험난할 수밖에 없다.
동양증권은 12월 12일 법원이 조기 매각을 승인해 줬고, 최근 대만 최대 증권사인 ‘유안타증권’이 매입을 위한 실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동양증권의 부실 규모와 매각 가격이다.
동양증권은 동양그룹 계열사들의 법정관리 직전까지도 해당 계열사들의 부실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팔았다. 동양그룹의 자금줄 역할을 하며 부실에 빠진 것이다. 때문에 동양증권 M&A는 부실 규모가 얼마나 될지, 또 인수자가 부실을 얼마나 떠안을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누가 얼마의 가격으로 동양증권에 베팅할지는 오리무중이다.
12월 22일 현대그룹이 현대증권의 매각 방침을 발표하면서 대형 증권사들의 M&A는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대형증권사 매물이 4개로 늘면서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 네 개 대형 증권사는, 인수 시 인수자가 단숨에 시장 주도자가 될 수 있어 그나마 국내외 다른 금융사들이 관심을 보인다.
◇중소형 증권사는 인수 희망자조차 없어…매각은 안 되고 매물만 늘어나 침체골 깊어져
이트레이드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리딩투자증권, 애플투자증권, 한맥투자증권 등 나머지 중소형 증권사는 인수 희망자조차 찾기 힘들다. 이 중엔 M&A 되지 않으면 생존이 힘든 증권사도 있다.
이트레이드증권은 범LG그룹 중 하나인 LS그룹(회장 구자열)이 우회 투자로 소유하고 있다. 수년째 M&A를 애타게 시도하고 있지만 시장에서 눈길을 못 받고 있다. 시장가치보다 높은 가격, 떨어지는 시장 경쟁력, 수익의 거의 전부를 개인투자자들의 매매 수수료에만 의존하는 단순한 수익구조 등 인수 대상으로서 매력이 없다. 아이엠투자증권과 리딩투자증권은 각각 CXC종합캐피탈, 큐캐피탈과 매각 협상을 했으나 거래가 무산됐다.
애플투자증권은 몇 년간 시도했던 M&A에 실패하며 인수 희망자 찾기를 완전히 접었다. 스스로 증권사의 문을 닫는 ‘청산’을 택했다. 애플투자증권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2008년 영업을 시작한 이후 매년 적자였다”며 “적자 누적으로 회사가 버틸 수 없었다”고 했다. 최근 460억원대 옵션거래 사고를 일으킨 한맥투자증권 역시 인수자를 찾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파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시장 시각이다.
M&A 매물 증권사들이 매각되지 못하면서 시장 침체가 깊어지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이 같은 혼란을 알고 있다. 지난 12월 16일 금융위원회(위원장 신제윤)는 증권사들에 자금 유입과 생존의 길을 터주기 위해 ‘증권사 M&A 촉진 방안’을 발표했다.
증권사 한 개 이상을 인수하고 ▶자기자본이 20% 이상 증가, 증가분이 500억원 이상이면 사모펀드 운영업 허용(자기자본이 1500억원 이상이면 자기자본 증가율 20% 인정) ▶자기자본 증가분이 1000억원 이상이면 개인연금신탁업을 허용 ▶자기자본이 5000억원 이상 증가하고 증가한 자기자본이 2조5000억원 이상(기존 3조원)이면 종합금융투자업무, 즉 IB(투자은행)업무를 허가해 준다는 것이다.
M&A를 통해 한 개 증권사 이상을 인수해 자기자본 2조 5000억원을 넘긴 증권사에 IB업무를 허용하겠다는 조건은 금융당국이 증권사 M&A 활성화에 상당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얼어붙은 증권사 M&A 시장이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시장은 회의적이다.
대신증권 강승건 연구원은 12월 16일 금융위 발표 직후 내놓은 ‘증권사 M&A 촉진 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금융위의 증권사 M&A 촉진 방안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헤지펀드 시장이 큰 폭으로 성장하고, 기업 대출 기회가 확대돼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며 “(이 부분에서) 실효성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승건 연구원은 특히 개인연금신탁업 허용에 대해 “이미 보험사(연금저축보험), 은행(연금저축신탁), 증권사(연금저축펀드계좌)를 판매하고 있다. 앞으로 가입자 증가율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세제 개편으로 소득공제 방식이 바뀌기 때문에 매력이 축소된 사업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M&A를 해 규모를 키운 증권사에 연금저축신탁을 허용해 줘도 증권사의 수익성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 이석훈 연구위원은 증권사 M&A 시장의 침체와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핵심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했다. 토종 증권사들의 경쟁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토종 증권사들의 수익구조가 놀라우리만큼 똑같다”며 “투자와 영업 등 어느 하나 특화된 게 전혀 없다. 이런 증권사를 인수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 곳의 예외 없이 토종 증권사들의 주 수익구조는 ‘고객들의 주식 거래 수수료 수익’ 하나다. 그런데 이 수수료 수익마저 급감하고 있다.
주간조선 확인 결과, 2011년 1월의 일평균 주식거래액(코스피 기준)은 7조6707억원이 넘었다. 그랬던 것이 2012년 1월에는 일평균 약 5조4171억원, 2013년 1월에는 일평균 약 4조4343억원으로, 그리고 지난 11월엔 일평균 약 3조6940억원까지 떨어졌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고객들의 주식 거래 수수료 수익에 의존하고 있는 토종 증권사들이기에 수익성이 급락할 수밖에 없다.
증권사들 모두가 수익을 내는 방식이 똑같고, 주식 시장 상황과 수익성까지 악화되고 있는데 굳이 인수 대상의 부실까지 떠안으면서 덩치만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한화증권은 적자 증권사인 푸르덴셜증권을 합병했고, 합병 후 심각한 동반 부실에 빠졌다.
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량 감원하고 있다. 한화투자증권이 연말까지 450명을 희망퇴직시킬 예정이고, 앞서 KTB투자증권이 100여명, 삼성증권과 SK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대부분의 증권사가 구조조정을 했다.
몇몇 증권사의 경우 인적 구조조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이 역시 임시방편일 가능성이 크다. 빨리 구조조정을 해야 증권업 시장이 살아날 수 있는데, 구조조정을 할 여건조차 마련돼 있지 못한 게 2013년 말 한국 증권업 시장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