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김치맛을 연구해라.”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당시 만도기계 사장)은 1991년 직원들에게 '김치맛을 분석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강원, 경상, 전라, 제주 등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각자 지방의 김치맛을 연구하고 김칫독의 원리를 적용한 냉장고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사장의 지시에 만도기계(위니아만도의 전신)에서 자동차 부품과 냉방기계를 만들던 엔지니어들은 김치 공부를 시작했다. 기상청의 도움을 받아 땅속 온도를 재면서 김칫독의 원리를 공부하고 요리 전문가들로부터 김장하는 방법도 배웠다. 위니아만도의 냉방기술이 김치냉장고 개발에 쓰였다.
정몽원 회장은 1993년 김치연구소를 세우고 엔지니어 출신의 전종인씨를 연구소장에 앉혔다. 위니아만도의 김치연구소 직원들은 3년 동안 100만 포기가 넘는 김치를 담그며 김치맛을 연구한 끝에 1995년 가을, 김치냉장고 '딤채'를 출시했다. 딤채는 첫해에 4000대를 판매하는데 그쳤지만,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김치냉장고 시대를 열은 제품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83년 금성이 첫 김치냉장고 만들었지만 대실패
딤채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김치냉장고는 아니다. 이보다 약 10년 앞선 1984년, LG전자(066570)(당시 금성사)가 ‘GR-036’이라는 이름의 플라스틱 김치냉장고를 처음 내놓았다. 딤채에 비해 기술이나 디자인면에서 훨씬 떨어진 ‘아이스박스’ 모양의 냉장고였다. 일반냉장고로부터 김치를 격리시켜 김치 냄새가 배는 것을 막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우전자도 ‘스위트홈’이라는 이름의 김치전용 냉장고를 내놓았다. 냉장고라기보단 김치를 보관하는 보온통에 가까웠다. 이들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차가운 외면을 받았다. 당시에만 해도 김치는 김칫독에 보관하는 것이 풍습이었고 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치냉장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아파트 세대가 많아진 10년 후였다. 위니아만도는 전통 김칫독의 냉각방식을 자사의 김치냉장고에 적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일반냉장고는 건조한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 공기를 차갑게 해서 순환시키는 간접냉각방식을 이용한다. 위니아만도는 딤채 김치냉장고에 공기가 아니라 저장실 자체를 냉각하는 직접냉각방식을 적용했다. 땅속에 있는 흙이 항아리를 감싸면서 차갑게 보관해주는 직접냉각방식을 김치냉장고에서 구현한 것이다.
삼성전자(005930)도 김칫독을 내세워 1998년 김치냉장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LG전자도 1999년 처음으로 서랍식 김치냉장고 '칸칸 서랍식 김치냉장고'를 내놓으며 본격적인 시장 확대에 나섰다. 시골에서 쓰던 '김칫독'을 그리워하던 아파트 세대 주부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후반 주부들 사이에서는 돈을 모아서 김치냉장고를 사기 위핸 '김치냉장고 계'가 유행하기도 했다.
◆김장철 앞두고 김치냉장고 성수기…김치맛으로 승부
김치냉장고는 가을에 가장 많이 팔려나간다. 특히 10월~12월에 한 해 판매량의 60%가 팔려나가고, 11월 한 달동안만 한 해 판매량의 30%이 판매된다.
국내 김치냉장고 보급률이 80%를 넘어서면서 주요 제조사들은 디자인, 김치맛에 중점을 둔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김치냉장고는 2002년에는 한해에 약 180만대가 판매되면서 정점을 찍고 나서 최근 들어선 약 100만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작년에는 경기 불황으로 김치냉장고 출하량이 10년만에 처음으로 100만대 밑으로 떨어진 99만대5800대를 기록했다. 900리터 이상의 프리미엄 냉장고가 상대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김치냉장고와 일반 냉장고를 각각 구매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도 많아졌다.
제조사들은 단순히 김치냉장고의 용량을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력적인 디자인을 적용하고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기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저장실 안에 냉기를 골고루 뿌려주는 '풀 메탈냉각' 기술, 위니아만도는 김치의 온도를 감지해 최적의 상태를 찾아주는 바이탈 발효과학, LG전자는 김치맛을 살려주는 유산균 생성 기술을 내세워 김장철 마케팅에 가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