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3시 30분 정부 과천 청사 1동 기획재정부 현관 앞. 영하 5도의 날씨 속에서 박재완 장관과 신제윤 1차관, 김동연 2차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현관 기둥에 달린 기획재정부 현판을 떼냈다. 현판은 이날 밤 세종시 신청사로 옮겨졌다. 현판 이전 행사를 끝으로 경제 부처 사령탑인 기획재정부는 '과천 시대'를 공식 마감했다.

1986년 1~2월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서울 광화문에서 과천 청사로 이전한 지 약 27년 만이다.

기획재정부 공무원 중 과천 생활을 가장 오래한 신제윤 1차관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1984년 재무부 사무관이 된 신 차관은 서울 광화문에 있던 재무부가 1986년 1월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과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이전 기념으로 청사 뒤뜰에 심었던 단풍나무가 1986년엔 내 키만 했는데 지금은 두 배로 컸다"면서 "나무가 잘 자란 것처럼 우리 경제가 급성장한 것이 과천 시대의 성과"라고 말했다.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GDP(국내총생산)는 1985년 984억달러에서 지난해 1조1164억달러(세계 12위)로 과천 시대 27년 사이 11배로 불어났다.

박재완 장관은 이날 행사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고 식민 통치와 전쟁까지 겪은 우리나라가 이룩한 경제 발전 모델은 지금 지구촌 여러 나라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면서 "과천 시대는 곧 개도국들에 새로운 발전 경로와 희망을 제시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과천 시대의 시작은 전두환 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4대 국정 지표 중 하나인 '문화 창달을 통한 민족문화의 중흥'을 위해 정부 청사로 쓰던 중앙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했다. 국무총리실 등 중앙청에 있던 부처들이 이전하면서 광화문 청사가 비좁아지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법무부 등 광화문에 있던 부처들을 과천 청사로 옮긴 것이다. 한 전직 관료는 "서슬 퍼런 군사 정권 시절이라 과천 이전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8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정부과천청사의 기획재정부 현판을 떼내고 있다. 이로써 1986년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의 이전으로 시작됐던 경제부처의 과천시대가 27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현재 과천 인구는 7만명이 넘지만 1986년만 해도 인구 1만6970명의 작은 도시였다. 최상목 기재부 경제정책국장은 "1994년 과천 청사까지 지하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야근을 할 때마다 서울 시내 집으로 돌아가려면 1인당 1000원씩 받는 총알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나가야 했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과천 시대 27년간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도입, 김대중 정부의 벤처기업 활성화,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금융 위기 대책 등 우리 경제사의 획을 긋는 굵직한 정책들을 쏟아내며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 많다 보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1993년 8월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가 대표적이다. 최규연 전 조달청장은 "금융실명제 도입 정보가 미리 새나가면 가명 계좌를 가진 사람들이 차명 계좌로 돌려 규제를 피해나갈 우려가 있었다"면서 "해외 출장을 가는 것처럼 가족과 동료까지 속인 후 과천의 한 아파트 비밀 사무실로 숨어들어 극비리에 대책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긴박한 상황에선 '법보다 주먹'이 앞선 경우도 있었다. 재무부 출신의 전직 관료는 "2003년 카드사태가 터졌을 때는 사재 출연을 거부하는 재벌 오너들을 압박하기 위해 주거래은행으로부터 해당 재벌의 약점을 넘겨받아 협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과천 시대가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쥔 재정경제원(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한 부처)의 비대화는 과도한 관치 금융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불러왔다. 재정경제원 출신 전직 고위 관료는 "재무부와 재경원 시절 은행과장이 은행 임원 인사를 전화로 지시할 정도로 관치 금융의 폐해가 심했다"고 말했다. 1997년 12월 당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와 임창열 부총리가 구제금융 지원 서류에 서명한 곳도 과천 청사였다.

과천에 있는 부처 중 올해 세종시 이전 대상은 4곳이다. 이 중 농식품부·국토해양부는 이전을 마쳤고, 기획재정부에 이어 환경부는 오는 27일 이전할 예정이다. 지식경제부·고용노동부는 내년 12월 이전 대상이며, 2014년 이후 과천에는 법무부만 남게 된다. 기획재정부는 20일 세종시 신청사에서 현판식을 갖고 세종 시대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