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교육은 서울 가산동에 15층짜리 건물을 세우면서 보일러 대신 냉난방 겸용 에어컨을 달았다. 올해 초 개원한 경기도 오산 세교 유치원은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폐열(廢熱·버려지는 열)로 물을 데워 여름 온수로 쓴다.
여름 한철 장사로 끝났던 에어컨이 열을 끌어오는 이른바 '히트펌프(Heat Pump)'로 진화, 보일러를 위협하는 난방시장의 새 강자로 떠올랐다.
◆시스템 에어컨, 300% 효율 자랑하는 히트펌프
1㎾ 전력으로 전기히터가 얻을 수 있는 최대 열량은 860㎉. 이 수치도 에너지 손실이 전혀 없다고 가정한 것이다. 지난 6월 LG전자가 출시한 히트펌프인 '하이드로킷(Hydro Kit)'은 1㎾ 전력으로 2752kcal의 열을 뿜어낸다. 휘센 시스템 에어컨과 연계해 난방과 온수를 공급하는 하이드로킷의 고효율 비결은 주위의 열(heat)을 퍼올려(pump) 구동하는 기계, 즉 히트펌프다.
에어컨이 실내에서 열을 흡수해 실외기로 열을 방출하는 기계라면 이를 거꾸로 구동시킨 히트펌프는 바깥의 열을 흡수해 실내에 방열하는 기계다. 공기·물·땅 등 외부의 열원을 끌어쓰기 때문에 같은 전력으로 3배 이상 효율을 내는 '요술'이 가능하다.
세계 1위 공조회사인 캐리어는 영하 20도인 한랭 지역에서도 난방할 수 있는 시스템 에어컨 'SMMS-i'를 지난 3월 내놓았다. 기온이 낮으면, 공기 중 흡수할 열이 없어 난방 능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에어컨 난방기의 단점을 극복한 제품으로 에너지관리공단으로부터 '한랭지 고효율 인증'도 받았다. 설치비를 제외한 연료비만 따지면 히트펌프 난방비는 경유보일러의 10분의 1 수준. 제주도 양식장에 쓰이는 대용량 경유보일러(15만㎉)의 100일 난방비는 3000만원이지만, 동급 히트펌프를 사용하면 336만원에 불과하다.
◆보일러 시장 대체하는 기술로 급부상
히트펌프 기술을 이용한 에어컨의 급탕 및 난방 능력이 커짐에 따라 연간 10만대로 추산되는 국내 보일러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국내 약 1만㎡(3000평) 이상 대형 빌딩에 보일러 없이 냉난방 겸용 에어컨만 설치되는 사례가 꾸준히 늘면서 보일러 시장을 잠식하는 것. 캐리어에 따르면 한국 시장에서 팔리는 상업용 에어컨 중 냉난방 겸용 제품의 비중이 2008년 52%, 2009년 58%, 지난해엔 66%까지 치솟았다.
세계 시장에선 일본 업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다이킨·도시바·산요·미쓰비시·히타치 등 일본업체들은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 대신 친환경 냉매(이산화탄소) 제품을 발 빠르게 개발, 전 세계 히트펌프 시장의 50%를 장악했다. 일본 정부는 에너지 사용량을 30% 절감할 수 있는 히트펌프 급탕기를 2020년까지 일본 전역에 1000만대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정부도 히트펌프를 채택한 건물에 1㎡당 35~50위안의 보조금을 지원하며 시장 확대에 앞장서고 있다. 산은기술평가원은 히트펌프가 보일러를 대체하는 기술로 급부상해 2014년에는 20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에어컨, '에너지 제로 하우스'의 중심으로
히트펌프가 주목받는 이유는 별도 연소과정이 없어 이산화탄소 감축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석유와 가스 등 화석연료로 물을 데우는 전 세계 연소형 온수기를 히트펌프 온수기로 대체하면 연간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8%가량 줄일 수 있다.
유럽 의회는 히트펌프로 모은 열을 재생에너지에 포함하는 법을 2008년 일찌감치 통과시켰다. 에어컨 폐열을 급탕용 에너지로 활용하고 하수구의 더운물에서 열에너지를 뽑아내는 등 에너지의 총량이 거의 제로(Near Zero)인 '꿈의 하우스' 시대에는 히트펌프 에어컨의 역할은 더 커진다. 유병준 오텍캐리어 이사는 "냉난방 에어컨이 주택에서 소모하는 에너지의 관문(gate way) 역할을 한다"면서 "에어컨은 에너지 소비와 재활용을 관장하는 '홈 에너지 센터'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