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서 한국의 산업은행이란 이름이 생소한 것 못지 않게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라는 이름도 국내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두 금융회사의 인수 협상이 연일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두 회사의 이름은 각각 태평양 건너 쪽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산업은행은 지난 10일 "협상을 중단했다"고 발표했지만, 산업은행이 '현 시점'이란 단서를 단 것은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협상을 재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리먼브러더스는 어떤 회사인가?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메릴린치 등에 이어 자산 규모 미국 4위의 대형 투자은행(IB)이다. 그런데 어쩌다 한국에까지 손을 벌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지난 3월 베어스턴스 파산 이후 '제2의 베어스턴스'로 지목돼 내리막길을 걷던 리먼브러더스에 지난 9일은 참담했다. 이날 리먼의 주가는 44.9%나 폭락해 주가가 7.79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올 들어 88% 가까이 폭락했다.
이날 주가 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한국이었다. 전날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지분 인수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전광우 금융위원장의 발언이 발단이 돼 인수 협상이 무산됐다는 관측이 뉴욕증시에 빠르게 확산된 것이다. 자산 규모에서 미국 4위 투자은행의 4분의 1도 안 되는 산업은행이 리먼 주가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주가가 폭락하자 리처드 펄드(Fuld) 리먼브러더스 회장은 3분기 실적 발표를 예정보다 일주일 이상 앞당겨 10일(현지시각) 전격 실시하면서 각종 경영 정상화 대책을 함께 발표했다. 그러나 무려 39억달러에 이르는 3분기 손실액에 비춰 자구 방안이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리먼 주가는 또다시 6.9% 폭락, 주당 7.25달러로 마감했다.
■효자 업종 '부동산 영업'이 부메랑 돼 직격탄
대형 투자은행으로 성장한 리먼이 최근 만신창이가 된 것은 '자신의 장점이 언젠가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리먼은 주식과 채권 매매, 리서치, 투자금융, M&A 등 다양한 금융업을 취급하고 있지만, 단연 돋보이는 업무는 부동산 관련 투자다. 1970년대 세계 금융시장에 부동산 담보증권(real asset backed security) 영업을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리먼브러더스다.
펄드 회장은 종전엔 신중하고 보수적인 투자를 선호했지만, 1993년 리먼의 새 선장이 된 이후 공격적인 투자를 내세웠다. 금융업종 간 벽을 허무는 글래스스티걸(glass steagall)법 폐지(1999년)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티그룹이나 HSBC처럼 거대한 예금자산을 갖고 있는 은행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덩치(자산)를 불려야 했다.
리먼은 자신의 장기인 부동산 관련 영업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2000년대 들어서는 부동산시장에서 인수한 모기지를 기초 자산으로 자산담보부증권(CDO) 등 파생상품을 잔뜩 만들어내며 레버리지 효과를 만끽했다. 지난 5월 말 현재 6390억달러의 자산 가운데 모기지 관련 자산이 무려 650억달러에 이른다. 총 자산의 10%가 넘는 규모다. 이 중 리먼이 올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한 CDO 규모는 60억 달러에 이르고, 그 25%가 투기등급 증권이다.
김근중 AT커니 코리아 부사장은 "미국 경기가 좋을 때에는 부동산 관련 영업이 리먼에 효자 노릇을 했지만 서브프라임사태와 부동산 경기 침체가 진행되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며 "월가에서는 리먼의 모기지 관련 자산 중 500억달러 정도는 건지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포착·대응 제 때 못해 위기 자초
리먼은 위기관리 능력에서도 문제를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위기를 조기에 포착하지도 못했고, 위기가 닥쳤을 때 적기에 대응하지도 못했다.
포천(Fortune) 보도에 따르면 이번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덜 본 IB 중 하나로 꼽히는 JP모간의 제이미 다이몬(Dimon) 회장은 지난 2006년 휴가 중이던 부하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서브프라임에 정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투자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는 당시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리먼브러더스는 비슷한 시기에 모기지 관련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선캘(SunCal)이란 부동산 투자회사를 통해 캘리포니아주의 리조트사업에 20억달러를 투자했다가 몽땅 날린 적도 있다.
또한 서브프라임 쇼크가 본격화되던 작년 말 이후 모건스탠리와 씨티, 메릴린치 등 다른 투자은행들이 아시아와 중동(中東)까지 날아가 국부(國富) 펀드를 끌어들이며 재빨리 자본 수혈에 나선 반면, 리먼은 이를 소홀히 했다.
이를 두고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미국 CNBC 주식프로그램 진행자인 짐 크레이머(Cramer)는 "펄드 회장이 리먼을 살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쳤다"고 꼬집었다.
그는 "리먼의 자회사인 자산운용사 누버거 베르만은 비교적 매력적인 매물인데도 원매자(願買者)를 찾지 못했고, 부실자산을 배드뱅크(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이나 채권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관)로 넘기는 방안을 구상했지만 오랫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리먼의 주가 폭락은 헤지펀드들이 공매도(空賣渡·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 주식을 빌린 뒤 팔아 차익을 버는 것)의 타깃으로 삼으면서 가속됐다. 크레이머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투자은행에 대한 공매도 제한조치를 취했을 때 리먼으로서는 신주 발행을 통해 자본금을 확충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이를 살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58년 전통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리먼브러더스는 1850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리먼(Lehman) 성(姓)을 가진 3형제가 설립했다. 씨티그룹이나 HSBC,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예금과 대출을 근간으로 하는 은행계 투자은행과 달리 리먼브러더스는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증권업을 기반으로 한 증권계 투자은행에 속한다.
펄드 회장은 10일 "우리는 예전에도 역경을 겪었지만, 늘 훨씬 강한 모습으로 벗어나곤 했다"고 말했다. 주요 주주들이 빠져나가면서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 경영권이 넘어갔던 1984년도 위기의 순간이었다. 리먼은 아메리칸익스프레스가 펼친 소매금융 위주의 소극적인 영업 때문에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기존 주주들이 1993년 아메리칸익스프레스로부터 지분을 인수해 경영권을 되찾았다.
이후 리먼은 펄드 현 회장 체제 아래 성장을 거듭했다. 1994년 30억달러에 불과하던 리먼의 순매출(총매출―이자비용)은 지난해 6배 이상인 193억달러에 달했다.
■백전노장 펄드 회장, 정상화 역부족?
그러나 펄드 회장은 몰락한 베어스턴스의 지미 케인(Cayne) 전 회장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해(1993년) 취임해 가장 오랫동안 월가를 지켜온 투자은행 CEO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케인 전 회장은 지난해 여름 서브프라임사태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시장을 떠나 브리지게임(카드놀이의 일종)에 빠져 있었다. 투자자들과의 컨퍼런스콜(전화회의) 때에도 인사말만 한 채 자리를 떴고, 뉴욕 사무실에서 매일 임원회의가 열릴 때에도 브리지게임 대회 참석을 위해 자리를 비운 채 전화로 때우기 일쑤였다.
반면 펄드는 회장 취임 이후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와 19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2001년 닷컴버블 등 세 차례 굵직한 위기를 경험한 백전노장이다. 리먼의 동료였던 블랙스톤(미국 사모펀드)의 스티븐 슈와르츠만(Schwarzman) 회장은 "펄드는 육감(六感)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터프가이 스타일인 그는 '고릴라'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그는 젊은 직원들처럼 컴퓨터를 늘 끼고 일한다고 해서 '디지털 마인드 트레이더'로도 불린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연내에 퇴진할 것이란 보도가 나오고 있고, 후임 회장 이름까지 언론에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