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한 달 앞두고 과학기술계 연구 현장이 혼란에 빠졌다. 웬만한 기업이나 기관은 새해 계획을 확정하기 바쁜 시점에 융합 연구를 준비하고 있던 연구자들은 기존의 사업이 사라지고, 새로 생기려던 사업마저 예산이 전액 삭감될 위기에 처하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발단은 지난 8월 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발표였다. 당시 과기정통부는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이라는 신규 사업을 처음 공개했다.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16.6% 삭감하는 와중에 이 사업에는 1000억원을 배정했다.
어떤 사업이길래 예산 삭감 와중에 신규 사업으로 편성된 걸까.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은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 민간 연구기관, 해외 연구기관 등이 힘을 합쳐 공동 연구를 하라는 취지의 사업이다. 출연연간 협력과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개별 출연연이 아니라 연구단 단위로 예산을 지원하는 제도다. 한 연구단에 지원하는 예산도 50억원 수준으로 늘려서 확실한 성과를 내도록 했다는 게 과기정통부 설명이다.
그런데 이 사업은 원래 있던 ‘융합연구단’ 사업을 축소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지금도 여러 출연연이 힘을 모아 하나의 융합연구단을 꾸려서 연구개발에 나설 수 있는 ‘융합연구단’ 사업이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주관하는 사업으로 적지 않은 성과도 냈다. 과기정통부가 매년 선정하는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뽑힌 융합연구 과제가 16건에 달한다.
제법 성과가 났지만 비슷한 성격의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이 생기면서 융합연구단은 사실상 폐지됐다. 융합연구단에 배정된 올해 예산은 430억8400만원이었는데 내년에는 327억6000만원으로 100억원 정도가 삭감됐다. 여전히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가지만 중요한 건 신규 사업이 ‘제로’라는 점이다. 기존에 지원하던 연구단에만 추가로 예산이 들어갈 뿐, 새로 연구단을 하나도 뽑지 않았다. 그나마도 기존 연구단 운영 예산도 요구보다 적게 반영됐다.
과기정통부는 기존 융합연구단은 수월성과 국제협력을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R&D 구조조정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관행대로 연구단을 운영하면서 쌓인 비효율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벌TOP전략연구단으로 개편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현장 연구자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진 융합연구단 사업에 당황스러워했다. 융합연구단 신규 사업 지원을 준비했던 한 출연연 책임연구원은 “연구자들에게 어떤 공지도 없이 갑자기 있던 사업이 사라져서 몇 년 동안 연구 계획을 세웠던 게 물거품이 될 위기”라며 “융합연구단을 준비하던 연구자들이 많을텐데 언질도 없이 뉴스로 폐지 소식을 접하게 하는 게 정상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낫다. 연구자들은 융합연구단 대신 ‘글로벌TOP전략연구단’ 사업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정부가 사업 계획을 발표한 8월말부터 출연연마다 내부적으로 글로벌TOP전략연구단에 참여할 연구자들을 모았다. 내부 경쟁을 거쳐 이미 사업에 참여할 후보를 뽑아놓은 출연연도 적지 않다.
그런데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이번에는 글로벌TOP전략연구단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더불어민주당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예결소위가 지난 14일 단독으로 R&D 예산안을 의결하며 글로벌TOP전략연구단에 배정된 1000억원을 전액 삭감한 것이다. 야당 관계자는 “‘글로벌TOP 전략연구단 지원사업’을 전액 삭감하고, 이 재원으로 연구기관 간 융합연구사업 예산에 500억원을 증액해 융합연구가 위축되지 않고 정상 추진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이 이어지며 장제원 과방위원장이 전체회의를 거부해 과방위 예결소위가 의결한 삭감안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이 같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글로벌TOP전략연구단 예산이 삭감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구자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을 준비한 대전의 한 출연연 연구자는 “벌써 11월 말인데 내년 연구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국회에서 나오는 뉴스만 보고 있다”며 “이름이 뭐가 됐든 국회에서 빨리 결론을 내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최대한 빨리 상황을 해결하겠다면서도 글로벌TOP전략연구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기존의 융합연구단은 출연연끼리만 협력을 할 수 있도록 해서 여러 파트너와의 협력이 불가능한 한계가 있었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연구자들의 불편을 빨리 풀어야겠지만 가급적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의 취지를 국회에 설명하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융합연구단 사업과 신설될 예정이던 글로벌TOP전략연구단을 모두 담당하는 NST는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차질 없게 준비한다는 입장이다. NST 관계자는 “매년 예산이 마무리되고 사업 공고가 나고 선정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예년에 비해 사업이 늦어진다고 볼 순 없다”며 “연구자들의 불편이 없도록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