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과학자들이 남극대륙 본토에서 처음으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도둑갈매기를 확인했다. 사진은 남극도둑갈매기./위키미디어

남극대륙 본토에서 처음으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의 존재가 확인됐다. 이전에 남아메리카와 남극권에 속한 섬에서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남극대륙 본토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펭귄 등 남극에서만 서식하는 생물종이 대규모 폐사할까 우려하고 있다.

26일(현지 시각) 스페인 정부에 따르면 과학혁신대학 산하 고등과학연구위원회(CSIC) 세베로오초아분자생물학센터 연구진은 지난 24일 아르헨티나 과학연구기지인 프리마베라 기지 근처에 죽어있던 도둑갈매기(Stercorariidae) 사체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중합효소연쇄반응(PCR) 검사 결과, 치명적인 고병원성 바이러스인 H5N1로 확인됐다.

H5N1은 2021년 처음 발견된 변종 바이러스로 전 세계적으로 퍼져 수 백만 마리의 야생 조류를 죽게 했다. 쥐와 족제비 등 포유류도 감염시킬 수 있지만, 바이러스마다 감염시킬 수 있는 종이 다른 ‘종간장벽’ 덕분에 인체에 감염될 위험은 극히 낮았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키며 해외에서 인체 감염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H5N1 감염 사례가 없다.

이전까지는 오세아니아와 남극대륙에서 H5N1 감염 사례가 없었다. 전문가들은 H5N1이 유행하는 북반구로부터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자연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같은 남극 이남 섬에서 조류독감에 걸린 새들이 발견됐다. 이어 약 4개월 만에 남극대륙 본토까지 H5N1이 퍼진 셈이다. H5N1이 발견됐던 남극 섬들과 본토간의 거리는 1600㎞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남극 이남 섬 제도에서는 갈매기, 도둑갈매기, 제비갈매기, 남방큰재갈매기 등 갈매기류뿐 아니라 알바트로스, 펭귄, 바다코끼리, 바다표범, 물개에도 H5N1이 퍼졌다. 지난해 12월에는 북극곰이 H5N1에 감염돼 사망한 첫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매튜 드라이든(Matthew Dryden) 영국보건안전청(UKHSA) 미생물학및전염병전문 컨설턴트는 26일(현지 시각)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통해 “이번 겨울 시즌 동안 남극 지역에서 여러 종에 영향을 미치는 고병원성 조류독감에 대한 보고가 많아졌다”며 “남극에서 야생동물에 접근하고 바이러스를 채취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남극대륙 본토에서 조류독감이 발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토니오 알카미(Antonio Alcamí) 세베로오초아분자생물학센터 연구교수는 “문제는 펭귄 같은 다른 종에게 전염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라며 “도둑갈매기류는 펭귄과 꽤 가까이 살기 때문에 앞으로 바이러스 전파 양상을 모니터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남아프리카와 칠레, 아르헨티나 일부지역에 H5N1이 퍼진 뒤 펭귄과 펠리컨, 부비새 등이 감염돼 50만 마리가 죽었다. 지난해 11월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조류독감국제연구소 연구진은 “H5N1 바이러스가 펭귄 서식지 전체에 걸쳐 퍼진다면, 이것은 현대 최대의 생태학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내기도 했다.

드라이든 컨설턴트는 “인간이 H5N1에 감염될 위험은 매우 낮지만, 전파 매개체가 될 수 있으므로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차단 방역을 해야 한다”며 “이외에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다른 조치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야생동물 간 전파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기를 바란다”고 안타까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