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8월 경기도 여주시 '경기 반려마루 여주'에서 수의사가 고양이 코와 입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검사를 위한 검체를 채취하고 있다./연합뉴스

반려동물에게 멸균하지 않은 우유나 날고기 등 생식(生食) 사료를 먹이면 고병원성(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커진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수의학계는 생식 사료는 과학적으로 반려동물에 대한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세균·바이러스 감염 위험을 키워 공중보건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5일 외신들에 따르면, 반려동물에게 생고기나 생우유 등 비가공 식품을 급여하는 것을 ‘자연주의 식단’이라고 소개하며, 소비·확산시키는 자연식 사료 전문 브랜드들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반려동물이 생식을 하면 자연 면역을 갖게 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보건당국과 전문가들은 가열 살균하지 않은 젖소의 생우유나, 열처리나 멸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소·닭고기는 오히려 반려동물의 바이러스 감염 위험만 높인다고 지적한다. 반려동물이 감염되면 함께 사는 사람도 위험해진다.

◇H5N1에 취약한 고양이, 생식이 감염 유발

조류 인플루엔자 H5N1는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이종으로, 표면에 있는 헤마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디아제(NA) 단백질이 각각 5형, 1형이어서 H5N1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HA는 바이러스가 호흡기 세포에 달라붙는 열쇠 역할을 하며, NA는 증식 후 세포를 뚫고 나오게 해준다.

최근 미국·멕시코를 중심으로 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야생 조류와 젖소, 가금류에 퍼져, 반려동물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식 사료를 먹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지난해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판매되는 생우유에서 H5N1 바이러스가 검출돼 해당 업체 제품이 리콜(제품 회수) 조치를 받기도 했다.

고양이는 특히 H5N1 바이러스에 취약하다. 장관 안에 H5N1 바이러스가 결합하는 수용체가 많아 감염 시 사망에 이를 확률이 50%에 달한다. 최근 미국에서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생식 사료를 먹고 H5N1에 감염돼 사망하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됐다. 보건당국은 시중에 판매되는 생닭이나 가공되지 않은 우유 등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했다.

반려동물이 H5N1 바이러스에 감염될 경우 인간까지 위험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H5N1은 고열에 약하지만, 생식 사료에서는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어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H5N1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되면 높은 치명률을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H5N1 감염 시 치명률은 50%에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조류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며, 사람 간 전파는 드문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 사례는 총 4건이다. 지난 1월 미국에서 뒷마당의 닭과 야생 조류에 노출된 65세 환자가 H5N1 감염 후 숨졌다. 이후 2월 캄보디아에서 닭 15마리가 죽어있던 닭장 근처에서 잠을 자던 아동을 비롯해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9일에는 멕시코에서 3세 아이가 H5N1 감염으로 사망했다.

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입자(주황색)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미국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생식 사료 열풍, 과학 근거 없어

미국수의학회(AAHA)는 “생식 사료가 반려동물의 건강에 좋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고, 오히려 세균·바이러스 감염 위험만 높인다”며 “최근 반려동물 생식 열풍은 백신 거부 운동과 닮은 반과학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생식이 반려동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가 만들어진 건 1940년대부터다. 미국 영양학자가 고양이 900마리에게 생식과 익힌 화식을 먹이고 건강 상태를 비교했더니 생식한 고양이군이 훨씬 건강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다.

이후 2000년대 중반 반려동물 식품 브랜드에 플라스틱 제조에 사용되는 멜라민이 발견되면서 기존 반려동물 사료 브랜드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았다. 이때부터 가공하지 않은 식품을 구해 사료로 먹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전문 판매 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에도 이러한 자연식 운동이 점차 확산하면서 관련 브랜드들이 나타나고 있다. 다만 멸균 처리하지 않은 생우유는 미국에서 낙농장이나 일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생우유 구매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관리·감독 강화와 공중보건 시스템 보완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반려동물을 통한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반려동물 생식 사료에 대한 안전 기준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반려동물의 병원체 검사 의무화,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이 있는 동물에 대한 백신 접종 등 과학적인 동물 보건 정책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 최근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부 장관이 식품의약국(FDA) 산하 수의약품센터(CVM)의 기능을 축소하고 인력을 해고하면서, 관련 대응에 차질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부서는 현재 H5N1 확산에 대한 주요 대응 기구로, 동물 감염 모니터링과 반려동물 식품 안전 규제, 백신 접종 정책 등을 총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