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에만 방사선을 내뿜어 죽이는 방사성 의약품(RPT)이 차세대 암 치료제로 주목받으며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기존 치료법보다 개발 기간이 짧고 부작용이 적은 데다,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의 RPT 제품이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하면서 글로벌 제약업계가 투자에 나섰다. 우리 정부도 국산 RPT 개발을 위한 지원 사격에 나섰다.
지난 17일 보건복지부가 K-헬스미래추진단(한국형 ARPA-H)의 연구과제의 일환으로 난치성 췌장암, 삼중음성유방암 대상 방사성 의약품(RPT) 연구기관을 발표했다. 서울대병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퓨쳐켐(220100)은 복지부로부터 5년간 150억원을 지원받아 국산 RPT 치료제 연구를 진행한다.
RPT는 암세포만 골라 방사선을 내뿜어 죽이는 의약품이다.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RPT가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대형 의약품(블록버스터) 반열에 오르자 RPT 투자 바람이 불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프레시던스리서치(Precedence Research)에 따르면, 전 세계 RPT 시장 규모는 2022년 52억달러(한화 7조원)에서 연 평균 10.2% 성장해 2032년 137억달러(18조원) 규모까지 커질 전망이다.
RPT는 항체-약물접합체(ADC)와 원리가 비슷하다. ADC가 암세포에 달라붙는 항체에 약물을 붙였다면, RPT는 암세포에 달라붙는 물질에 방사선을 내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결합했다. 전통 신약보다 개발 기간이 짧고 부작용이 적다는 게 장점이다. RPT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종류에 따라 암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방사성의약품 시장은 노바티스가 이끌고 있다. 2022년 출시한 전이성 전립선암 치료제 플루빅토(Pluvicto)는 1년 만인 2023년 연 매출 10억달러(한화 1조4400억원)를 돌파해 첫 RPT 블록버스터가 됐다. 지난해 매출은 13억9200달러(1조8780억원)를 기록했다. 플루빅토는 방사성 동위원소인 루테튬이 전립선암에 많이 발현되는 단백질과 결합한 형태로, 암세포에만 치료용 방사선을 쏜다.
플루빅토는 국내에서도 지난해 8월부터 처방되고 있다. 회당 수천만원에 이르는 고가이지만, 효과가 입증되면서 전 세계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임상시험에서 암의 진행이나 전이 없이 생존한 기간인 무진행생존기간(rPFS)을 표준치료법보다 2배 연장시켰고, 사망 위험도 38% 줄여 전립선암 치료제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다른 글로벌 제약사들도 RPT 블록버스터 만들기에 돌입했다. 미국 일라이 릴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등이 관련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노바티스도 업계 1위 자리를 굳히기 위해 RPT 기술을 보유한 다른 기업들과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다.
노바티스는 2017년 프랑스 RPT 전문업체인 어드밴스드 액셀러레이터 애플리케이션스(AAA)를 약 2조7400억 원에, 2018년 미국 엔도사이트(Endocyte)를 약 5조800억원에 인수했다.
BMS는 미국 레이즈바이오(RayzeBio)를 5조8900억원에, 아스트라제네카는 캐나다 퓨전 파마슈티컬스(Fusion Pharmaceuticals)를 3조4400억원에 사들였다. 릴리도 미국 포인트 바이오파마(POINT Biopharma)을 1조8000억원에 인수했다.
국내에서는 SK바이오팜(326030)이 SK(034730)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첫 국산 RPT 탄생에 투자를 시작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녀인 최윤정 사업개발본부장(부사장)이 신약 후보물질 도입부터 방사성 동위원소 공급 계약까지 사업 전반을 직접 챙기고 있다. SK바이오팜은 홍콩 풀라이프 테크놀로지스(Full-Life Technologies)로부터 도입한 RPT인 ‘SKL35501′의 임상 1상 시험을 올해 하반기 중에 신청할 예정이다.
SK바이오팜은 RPT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방사성 동위원소도 확보했다. SK그룹이 투자한 미국 원자력 기업 테라파워(TerraPower)와 공급 계약을 맺어, RPT용 방사성 동위원소인 악티늄-225(Ac-225)를 공급받을 수 있다. 악티늄-225를 쓰는 RPT 개발을 위해 한국원자력의학원과도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듀켐바이오(176750)는 진단용 RPT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양자성 컴퓨터단층촬영(PET-CT)을 통해 암, 파킨슨병, 치매 등을 진단하는 RPT를 제조하고 있다. 내달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는 일본 에자이의 치매 신약 ‘레켐비’는 PET-CT 촬영으로 약이 들을 환자인지 확인한 뒤에 처방받을 수 있다. 듀켐바이오는 이때 사용되는 치매 진단용 의약품 생산을 맡았다. 최근에는 치료용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창업한 RPT 업체인 라디오디앤에스랩스의 지분 100%를 23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국내 RPT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RPT 개발에 쓰이는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과 기술 개발을 위한 기반 시설 투자를 늘리고, 생산·사용 등 전주기에 걸친 관리 체계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