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추진하는 ‘팬데믹 협약’에 가입할 지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이 협약에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백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익 공유’ 조항이 포함될 예정인데, 이 조항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또 다른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백신 치료제를 개발하는 국내 제약사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일 의료계와 제약업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사태 대응에 국제 사회가 할 의무를 담은 WHO 팬데믹 협약 초안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와 산업계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WHO 회원국들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감염병 사태가 전 세계 불평등과 국제적 대응 시스템의 약화를 초래했다며 2021년 12월에 국가가 전염병을 더 잘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규칙과 규범을 정의하는 ‘전염병 협정(때로는 전염병 조약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는 국제 협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WHO 회원국 194개로 구성된 정부 간 협상 기구(INB)는 지난해 12월 팬데믹 협약 구상에 합의하고, 지난달 총회를 열고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협약에서 문제가 된 조항은 ‘접근과 이익 공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제12조다. 이 조항에서는 감염병 대유행 때 개발한 백신과 치료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이익을 나눠야 한다고 봤다.
이 조항이 나온 배경은 전 세계 의약품 개발 구조에 있다. 지금까지 감염병 백신 치료제는 개발도상국에서 병원체를 제공하면, 선진국이 이를 바탕으로 의약품을 개발해 왔다. 코로나19 때도 이런 방식으로 선진국들이 백신 치료제를 개발했으나, 자국 비축용으로 의약품을 쌓아두고, 다른 나라에 공급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됐다. 이번 협약에선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병원체를 공급받으려면 백신 치료제 이익 10~20%를 내놓을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
정부는 물론이고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 녹십자(006280),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협약에 가입하면 감염병 시기에 발생한 이익의 20%를 WHO에 돌려줘야 할 수도 있다”며 “선진국 정부는 자국의 제약산업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WHO는 내년 5월까지 팬데믹 협약을 채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합의에 이를지는 불투명하다. 200개에 가까운 회원국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난관이다. 유럽은 팬데믹 조약에 호의적인 분위기지만, 미국에서는 의회를 중심으로 팬데믹 협약이 미국의 ‘백신 주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 팬데믹 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