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 재계가 대응 방안을 찾느라 고심하는 가운데, 미국의 로비업체들이 고율 관세를 피하고 트럼프 대통령이나 고위 인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하면서 거액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5일 정치권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로비업체인 H사는 지난해 12월 최태원 SK그룹 회장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로비 계약 제안서를 발송했다. 이 업체는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로비 활동의 대가로 1억달러(약 1454억원)를 요구했다.

조선비즈가 입수한 제안서를 보면 이 로비업체는 최 회장과 SK 측에 대미(對美) 수출 시 관세를 현재 적용되는 수준의 50%까지 줄이고, 무역 절차도 간소화되도록 돕겠다고 했다. 또 SK가 전기차 배터리, 에너지, 화학 등 핵심 사업을 미국에서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트럼프 대통령이나 행정부 핵심 인사들과 만날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 업체는 최 회장이 제안에 응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와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장 등에 초청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대통령 취임식과 만찬 등에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H사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멕시코 정부와도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과의 만남 주선, 세금 감면과 무역 절차 간소화, 현지 사업 기회 제공 등 미국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성과 목표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SK가 H사의 제안에 응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아직 트럼프 대통령이나 주변 핵심 인물들과 직접 만나지 않았고,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초청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이 때문에 이 제안서가 SK 고위층에 전달되지 않았거나 경영진이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H사를 포함한 많은 미국 로비업체는 정보가 거의 공개돼 있지 않아 국내 기업들이 제대로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SK 외에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LG그룹 등 미국 사업 비중이 큰 다른 대기업에도 미국 로비업체들이 접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율 관세와 규제를 피하기 위해선 트럼프 행정부 핵심 인사들과의 직접적인 소통 창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로비스트의 역할이 필요할 때가 있다. 미국에서는 로비 활동이 법적으로 허용된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한 이후 몇몇 총수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들과 만났다. 정용진 신세계 회장은 마러라고 사저와 대통령 취임식 이후 만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만났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미국 프로골프투어(PGA) 제네시스 인비테셔널 프로암에 트럼프 주니어를 초청해 만났다.
재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 핵심 인사들과의 사적인 친분이 없거나, 미국 대관이 약한 기업은 미국 로비업체들의 제안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외에도 다양한 규제와 정책 변화를 통해 해외 기업들로부터 이권을 취하려 할 것”이라며 “절박한 국내 기업의 사정을 파악한 미국 로비업체들에는 좋은 사업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