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주요 아파트 단지 소유주들이 직접 재건축 추진과 관련된 일에 나서고 있다. 재건축을 위한 정비계획을 짜서 자치구나 서울시의 심의를 받거나 소유주들의 동의를 모아 재건축 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기도 한다. 오픈 채팅방을 운영하거나 정기 소식지를 발간해 재건축과 관련된 정보를 많은 사람에게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변호사나 의사 등 현업에서 활동하는 30~40대 전문직들이 대부분이다. 보통 강남의 재건축 관련 업무는 인근 주요 아파트 단지에서 재건축 업무를 전담했던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분야다. 이들은 건축사, 감정평가사, 법무사 등으로 이뤄진 정비업체와 시공사(건설사), 인테리어업체 등과 긴밀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 일종의 카르텔이 형성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비업계에서는 “카르텔을 깨려는 전문직들의 도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 강남 대치미도아파트(왼쪽부터), 반포미도아파트, 삼풍아파트.

20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초구 반포동 60-4번지에 있는 반포미도1차아파트의 김승한 재건축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법무법인 니케의 형사‧부동산 전문 변호사다. 1984년생으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2020년 11월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

추진준비위원들과 함께 정비계획(안)과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 4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쳐 정비구역으로 지정됐고 같은 해 12월 김 변호사는 조합설립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추진위는 지난달 서초구에 승인을 받았다. 오는 6월 조합 창립총회를 하고 내년 초 시공사 선정 후 서울시에 건축‧교통‧환경영향평가를 통합 심의받아 사업시행인가를 얻을 계획이다.

현재 8개 동, 1260가구, 전용 84㎡ 단일 평형으로 이뤄져 있는데 재건축으로 전용 59~157㎡로 평형을 다양화해 최고 49층, 1739가구로 바꿀 계획이다. 김 위원장은 “단지의 재건축을 잘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어 선두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서초구 서초동 1685번지 일대 삼풍아파트도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1988년 지어진 단지로 전용 79~165㎡ 중대형 평형으로만 구성돼 있다. 서초동 아크로비스타와 인접해 있는 단지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배우자와 공동으로 전용 165㎡를 보유한 곳이기도 하다.

김동석 변호사(사법연수원 20기)와 법무법인 안국법률사무소의 정희찬 변호사(사법연수원 30기) 등 5명의 소유주는 ‘서초 삼풍아파트 소유주 모임 SOS’를 만들어 조합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오픈 채팅방과 홈페이지를 만들고 재건축 시 추정 비례율, 종전 자산가치 추정액 등을 담은 정비계획 초안을 만들어 공유했다. ‘서초힐스’ ‘서초더힐’ 등 재건축 후 단지 이름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희찬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하는 업무 중 정비계획을 짜는 것도 포함된다”라며 “소유 재산 목록 1호인 집을 잘 재건축하기 위해 노력하면 이 아파트에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좋아지는 것이기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구 대치동의 미도아파트(한보미도맨션)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까지 나서 재건축 추진에 나섰다. 미도아파트는 대치동을 대표하는 재건축 아파트로 우성, 선경과 더불어 ‘우선미’로 불린다. 1983년 2436가구, 총 12개 동으로 이뤄진 곳이다. 서울시의 정비계획, 정비구역 지정과 지구단위계획 결정을 위한 심의를 앞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김용혁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문길남 전 신세계건설 부사장이 ‘대치미도 재건축 협의회’를 결성했다. 김 교수는 평일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진료하며 주말에만 협의회 활동을 하고 있다.

협의회는 인근 서초무지개아파트를 그랑자이로 재건축한 구대환 조합장을 초빙해 성공 노하우 강연을 개최했고 소식지를 발간하는 등 조합설립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협의회를 만든 것이) 후회되는 부분도 있지만 일단 시작했기 때문에 조합을 설립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정비사업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재건축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정비업체와 인테리어업체, 시공 건설사 등과 일정 부분 유착해 왔다”며 “이 과정에서 금품수수 등 부적절한 행동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전문지식과 열정을 갖춘 소유주들이 이런 행태를 참지 않고 직접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종의 카르텔을 깨려는 도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