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대형 산불’ 참사를 계기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1조5000억원 한도의 ‘국고채무부담행위’ 카드가 추경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여야간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국고채무부담은 일종의 정부 ‘외상비’로, 내년도 예산에 빚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전날 정책조정회의에서 “산불 대응을 위한 추경이 불필요하다”며 ‘재난대책비’와 ‘목적 예비비’ 그리고 ‘국고채무부담액’(1조5000억원)이 동원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기정예산과 예비비를 투입하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국고채무부담행위’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국고채무부담 예산 1조5000억원은 시설 복구 등에만 사용 가능한 예산으로 재난 피해 주민들을 위한 보상금이나 생계비 지급 등으로 활용할 수 없다”며 “즉각 지급할 수 있는 예산이 아니라 사실상 ‘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 산불피해 지원을 감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남 산청·하동 산불 일주일째인 지난 27일 오후 지리산과 인접한 산청군 시천면 동당마을 일대에서 산청군 소속 산불진화대원들이 산불 진화 작업 중 지쳐 잠들어 있다. /뉴스1

경상권에서 7일째 이어지고 있는 ‘대형 산불’로 산림 피해뿐 아니라, 사망 28명·부상 32명 등 인명 피해(전날 오후 8시 기준)도 발생하고 있다. 기재부 내부에서는 산불 진화 완료 뒤 정확한 피해 내역을 집계해 봐야겠지만, 역대급이었던 ‘2022년 동해안 산불 피해’ 복구비(4170억원)보다 더 큰 규모가 필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산불을 계기로 추경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여권 중심으로 그런 목소리가 거세다. 산불 피해는 추경 요건인 ‘재해·재난’에 명확히 해당한다. 이에 일각에선 ‘원포인트’ 산불 추경도 가능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된다. 2002년 태풍 루사, 2006년 태풍 에위니아 때 정부가 원포인트 추경으로 4조1000억원, 2조2000억원을 각각 편성한 바 있는데, 이 돈은 전액 피해 복구에 쓰였다.

현재 쓸 수 있는 예산은 산림청 약 200억원(예산 1000억원 중 전년 발생 재해 복구 사업 집행 분 제외), 행정안전부 재난대책비 약 1200억원(예산 3600억원 중 제주항공 참사 지원 제외)과 목적 예비비 약 4000억원(1조6000억원 중 무상교육 관련 우선 배정분 제외) 등이다.

지난 27일 전북자치도 무주군 부남면 산불 화재 현장 인근 금강에서 산림청 헬기가 산불 진화용 물을 급수하고 있다. /뉴스1

여당은 이런 기정예산과 예비비로는 빠듯해 추경이 시급하단 입장이지만, 야당은 국고채무부담행위 카드가 있으니 추경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고채무부담행위는 과거에도 대형 재해·재난 때마다 등판한 적 있다. 쉽게 말해 일종의 정부 ‘외상비’다. 국가재정법 25조에 규정된 국고채무부담행위는 비상사태에 대응해 정부가 예산을 추가 확보하지 않고 빚을 질 수 있는 제도다. 정부가 지출이 필요한 계약을 미리 맺고, 지출은 다음연도 이후의 예산에 계상하는 형태다. 일반적 국고채무부담행위는 사전에 사업·금액을 특정해 국회 의결을 받아야 하지만, 재해 복구를 위한 국고채무부담행위는 사전에 국회 의결을 받은 한도액 내에서 채무를 지면 된다.

국고채무부담행위는 ▲2002년 태풍 루사 ▲2011년 구제역 발생 ▲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 때 가동된 바 있다. 관련 예산과 예비비로도 재원 충당이 어렵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2020년 8월 수해 당시엔 이번 사태와 비슷하게 ‘추경(그해 4차 추경)’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커졌었는데, 당시 이런 필요성을 잠재우며 홍남기 전 부총리가 내세웠던 카드가 국고채무부담행위였다. 물론 그 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해 결국 4차 추경이 단행되긴 했다. 국고채무부담행위로 이른 추가 추경 편성을 막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만약 이번 산불 대응으로 국고채무부담행위가 동원된다면 5년 만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경북 안동 지역 산불 피해 현장을 방문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신속히 검토해 조만간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기재부는 이런 산불 피해 복구 외에도 기존 산불 대응 관련 시스템에 무엇이 문제인지 점검하는 작업도 병행 중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산불 진화 헬기 등 장비 부족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