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필독서가 된 ‘칩워’(Chip War)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는 중국의 파운드리(위탁제조) 업체인 SMIC가 7나노급 첨단 반도체를 자체 개발한 것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밀러 교수는 최근 진행된 조선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중국의 현재 반도체 산업 능력에 대해 “칩 산업에서 중간 규모의 플레이어에 불과하다”면서 “다른 곳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중국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칩은 단 한 종류도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특히 SMIC의 7나노 반도체에 대해서도 “SMIC가 직면한 어려움을 보여준다”면서 “5년 전에 비슷한 공정을 늘린 TSMC를 따라잡진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세계의 반도체 전문가들은 SMIC의 7나노 공정이 TSMC가 폐기한 기술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수율 등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밀러 교수는 삼성전자가 오는 10월 20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개최하는 ‘삼성 메모리 테크데이 2023′에 특별 연사로 참여할 예정이다.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세계사 교수인 밀러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외 관계를 주로 가르친다. 반도체 전문가가 아닌 국제정치 전문가이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밀러 교수는 국가 간 패권 경쟁의 핵심 요소를 반도체로 봤다.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도 고성능 반도체를 탑재한 초정밀미사일을 개발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책에서 서술했다.
이러한 ‘칩워’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최근엔 군사 분야에 인공지능(AI)이 접목되면서 AI 반도체 기술이 군사력 경쟁의 핵심이 됐다. 고도화된 첨단 반도체에 힘입어 국방 전략을 짠다는 것은, 고도화된 반도체에 국방을 의존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는 책에서 “중국의 반도체 독립이 성공한다면 세계 경제를 다시 만들고 군사력의 균형을 재설정하게 될 것”이라며 “강철과 알루미늄이 2차 세계대전의 승부를 갈랐다면, 지금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아마도 ‘컴퓨터의 힘(Computing Power)에 의해 판가름이 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반도체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적인 통제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중국은 앞으로도 계속 굴기를 시도할 것이고, 미국은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한국에 기회일까, 위기일까.
밀러 교수는 “가장 큰 리스크는 중국이 하이엔드 메모리칩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기술 이전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고 했다. 미국과 함께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음은 밀러 교수와의 일문일답.
─최근 중국 기업인 SMIC가 자체적으로 7나노 공정 칩 개발에 성공했다. 의미가 무엇인가.
“SMIC의 7나노 미세공정 반도체 개발 성공은 미국과 일본, 네덜란드 3국의 대(對)중 제제에 빈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대중 제재는 더 강화될 것이다. 다만 이번의 기술적 성과는 SMIC가 직면한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5년 전에 비슷한 공정을 늘린 TSMC를 따라잡진 못했다.”
─얼마 전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에서 SK하이닉스의 메모리칩이 발견됐다. 규제 강화가 한국 기업으로 불똥이 튀진 않을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메모리 칩은 대량 생산되고 있고, 제삼자 유통을 통해 쉽게 구매할 수 있다. 화웨이가 메모리칩을 구매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만약 화웨이가 탑재한 메모리 칩을 제삼자 유통업체에서 구입했다면, 생산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순 없다. 책임은 유통업체가 져야 한다.”
─책에서 ‘미군은 해외에서 생산된 칩이 보안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기술했다. 미국의 동맹인 한국이나 외교적으로 가까운 대만도 포함하는 표현이었나.
“한국에서 생산한 칩에 대해선 크게 보안 문제를 우려하는 것 같지 않다. 미국과 한국 간에는 깊은 동맹이 있다. 한국과 미국의 기술 기업 간 협력도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중국이다. 중국의 영향력을 크게 받는 나라나 개입할 여지가 있는 나라도 우려의 대상이다.”
─현재 중국의 반도체 산업 능력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중국이 직면한 도전은 칩 산업에서 중국이 ‘중간 규모의 플레이어’(medium-sized player)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중국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칩은 단 한 종류도 없다.”
─중국이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쓸 수 있는 지렛대는 무엇이라고 보나.
“중국은 외국 기업들이 공급하던 것을 자국 기업 으로 대체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장기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중국 입장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이다.”
─일부 전문가는 중국에 대한 기술 통제가 오히려 자체적인 생산력을 늘리고, 반도체 산업 역량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중국은 이미 자급률 강화에 오랫동안 매진해 왔다. 2014년 이후 중국은 자국의 칩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수십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기술 통제 전부터 중국은 이미 자급률을 높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기술 통제는 반도체 산업 육성 및 자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다. 이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굴기에 대한 열망 달성을 어렵게 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반도체와 양자 컴퓨팅, AI에 대한 미국 자본 투자를 규제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했다. 이 세 분야를 콕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해당 분야는 군사 기술과 관련이 있다. 더불어 민간 시스템과도 높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민간 투자자들은 이러한 분야에 투자할 때 개발되는 기술 능력이 군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올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유례없는 수출 감소 등 위기를 겪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나.
“메모리 칩 시장은 항상 주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올해 메모리 회사는 PC와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에 대한 수요 둔화로 어려움(headwinds, 역풍)을 겪고 있다. 한국기업들도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이건 단기적인 경향이며, 결국은 상승 주기가 돌아올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칩 디자인을 포함해 반도체 공급망에서 다양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침체기에 한국 정부와 기업이 해야할 과제는 무엇인가.
“침체는 비교적 빨리 끝날 것이다. 칩 디자인과 AI 등 성장 잠재력을 보유한 산업에 투자하는 것을 포함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기술 통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보나.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고 보나.
“이들 기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중국이 하이엔드 메모리칩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기술을 확보한다면) 중국은 즉각 시장에서 (자국기업으로) 대체할 것이다. 중국에 앞서기 위해선 혁신을 계속해야 한다. 동시에 경쟁사를 강화할 수 있는 기술 이전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