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관련 예산을 보고도 없이 삭감했다고요?”
이달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반도체특위) 위원장과 독대한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요청한 경기도 평택·용인 반도체 단지 전력·용수 인프라 구축 관련 예산을 기획재정부가 전액 삭감한 사실을 보고받고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날 윤 대통령은 양 위원장을 포함한 반도체특위 소속 위원들과 오찬 자리를 가졌다.
기재부가 거부한 반도체 관련 예산은 총 1조원 규모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비즈 취재 결과 1조원은 향후 5년간 소요되는 총액이고, 산업부에서 요청한 내년 예산 규모는 1000억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대통령이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자 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로 규정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강조했음에도 기재부는 그 반도체에 대한 1000억원 예산 투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최상목 경제수석에게도 반도체 예산을 특별히 잘 챙기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의 분노를 접한 기재부가 평택·용인 반도체 단지 인프라 구축 지원에 관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산업부 “1000억원만 지원”…기재부 예산실은 “0원”
20일 기재부·산업부 등 경제 부처에 따르면 산업부는 평택·용인 반도체 단지의 전력·용수 등 필수 인프라 구축 비용을 국비로 지원하는 내용을 2023년 정부 예산안에 포함하려고 했다. 산업부는 해당 사업에 5년간 2조원 이상이 쓰일 것으로 봤고, 이 중 절반가량인 1조원을 기재부에 요청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 기업이 부담하는 매칭 펀드 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구상이었다.
당장 내년에 필요한 예산은 1조원의 38%인 3800억원. 산업부는 이 돈의 약 4분의 1인 1000억원만 기재부에 신청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예산 실링(Ceiling·정부 예산 요구 한도액)을 고려해 1000억원을 요청한 것”이라며 “현 정권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와 현실적인 예산 배정 여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000억원 정도는) 협의해볼 만한 수준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재부는 산업부의 1000억원 예산 요구를 전액 삭감했다. 기재부는 반도체 기업들이 이미 계획을 수립해 진행 중인 사업에 국비를 지원하는 건 비용 절감 외에 기대할 만한 효과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대기업 퍼주기 논란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만큼 기재부 예산실 내부에서도 “해당 예산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최고위층에서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여주시 몽니에 발목 잡힌 SK하이닉스
결국 평택·용인 반도체 단지 인프라 구축 지원이 빠진 산업부 예산안이 국회로 넘어갔다. 반도체 업계는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역력하다. 전력·용수 등의 인프라 건설은 공공에서 풀어줘야 할 문제인데, 기재부가 뜬금없이 “국비로 기업의 비용 절감을 도울 수 없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지자체 간 이해관계 조율의 문제”라며 “이 예민한 사안을 기업 스스로 해결하라는 건 정부가 반도체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산업단지) 내 공업용수 취수 문제로 경기도 여주시와 갈등을 빚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SK하이닉스가 총 120조원을 투자해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고당·죽능리 일원 415만㎡ 부지에 차세대 메모리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사업이다. SK하이닉스는 여주 남한강에서 하루 26만5000톤(t) 규모의 공업용수를 취수하기 위해 작년 5월 용인시에 공업용수 시설 구축 인허가를 요청했으나, 여주시의 반대로 아직 착공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2015년 착공한 평택 반도체 공장의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5년을 허비했다. 평택 공장에는 총 24㎞의 송전선로가 지나갔는데, 안성시 원곡면 주민이 건강권을 이유로 지중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갈등 끝에 삼성전자와 한국전력(015760)은 2019년 3월 법원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해당 구간에 터널을 뚫어 지중화하기로 했다. 산업부가 기재부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예산에는 이 평택 공장 전력 지원 내용도 담겨 있었다.
◇ 윤 대통령, 경제수석에 “반도체 예산 잘 챙겨달라” 주문
지난 14일 열린 윤 대통령과 반도체특위 위원들 간 만남에서도 기재부의 산업부 예산 삭감이 주목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찬에 참석한 한 인사는 “위원들이 (윤 대통령에게) 예산 책정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며 “정부가 인프라 구축을 둘러싼 지자체 간 입장 차 조율에 나서겠다는 일종의 선언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 발주로 전기·용수로 관련 사업이 추진돼야 지자체 간 입장 조율과 이해관계자 설득이 용이하다는 점을 이야기했다”면서 “이 문제는 기업 비용을 정부에 떠넘긴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않고, 양향자 위원장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기재부 결정에 아쉬움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최상목 경제수석에게 향후 관련 예산 책정 여부를 잘 챙기라고 지시했다. 또 윤 대통령은 “시장 원리로 이뤄지지 않는 부분, 선제적 투자가 필요한 부분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하겠다. 정부도 ‘기업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기재부를 겨냥한 말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부 안팎에서는 대통령실 분위기를 감지한 기재부 예산실이 ‘반도체 예산 책정 불가’ 입장을 조만간 바꿀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양향자 위원장은 조선비즈에 “이 문제와 관련해 기재부 측과 활발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