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순부터 꾸준히 올라온 원·달러 환율이 1300원에 육박할 만큼 치솟은 가운데, 국민연금의 해외 자산투자가 원화 약세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미국 재무부 환율 보고서를 통해 나타났다. 원·달러 환율 상승이 국내 투자한 외국인 자본 유출이 아니라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투자를 통해 증폭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내용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일각에선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2000년대 중후반 원·달러 환율을 900원 아래로 끌고 내려갔던 조선업체 수주와 비슷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매해 크게 늘어난 것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증권 투자가 급증한 2019년 하반기 이후 원·달러 환율은 1100원대 중후반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올해들어서는 1200원대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 /뉴스1

◇ 美 보고서 “국민연금發 상당한 자본유출, 원화 절하 원인”

20일 외환당국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가 공개한 상반기 환율 보고서는 ‘주요 교역 상대국의 경제 발전’ 중 우리나라를 기술하며 ‘국민연금’과 관련한 내용을 포함했다. 재무부는 “원화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계속해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며 “세계 금리 인상과 지정학적 불확실성 고조 등에 따른 ‘상당한 자본 유출’이 원화 절하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의 해외 자산 보유 규모가 2700억달러에서 3300억달러로 지난해 한해에만 600억달러 증가했다”고 부연했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에 따른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음을 강조한 셈이다. 미국 환율보고서가 그간 한국을 분석할 때 경상흑자, 당국의 개입,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채권 및 주식 매매 동향 등을 언급해온 것과는 달라진 기류다.

국민연금의 지난해 해외 자산 보유 규모 증가액 600억달러는 지난해 외환보유액 증가분(약 200억달러)의 3배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규모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2020년 약 4431억달러에서 지난해 약 4631억달러로 증가했다.

미국 재무부의 2022년 상반기 환율보고서 중 한국의 국민연금 영향력을 꼬집은 대목(오른쪽).

◇ “국민연금 해외투자 확대, 환율 하락 억제하고 있어”

실제로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증권 투자액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은행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대외금융자산 중 증권투자 추이를 보면, ▲2016년 3049억달러 ▲2017년 4246억달러 ▲2018년 4649억달러 ▲2019년 5778억달러 ▲2020년 7082억달러 ▲2021년 8346억달러 등으로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해외 비중이 2010년 10% 안팎이었던 국민연금의 자산투자 포트폴리오는 2022년 현재 해외 주식 투자 비중만 27%에 이를 정도다. 해외 채권과 주식을 합한 투자 비중은 35%를 넘어선다. 국민연금의 공격적 해외투자로 인해 2015년 1545억달러였던 우리나라의 대외 지분성증권 투자액은 지난해 5917억달러로 4배 가량 급증했다.

이런 국민연금 등 금융기관의 해외 증권투자가 급증하는 동안 원·달러 환율도 상승 곡선을 그렸다. 특히나 지난해 중반부터 최근까지 오름세가 지속되고 있다. 월평균 원·달러 환율을 살펴보면, 2020년 7월부터 1100원대에서 등락하다가 2021년 6월(1121.99원)을 기점으로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해 3월엔 1200원대에 진입했는데 지난달 월평균 환율은 1268.38원을 기록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해외직접투자 등 일부 지표를 봐도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움직임을 보이는 걸로 안다”며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가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모양새”라고 했다.

그래픽=이은현

◇ 한은도 ‘경고등’…”국민연금, 외환 유출 요인 돼”

이런 위험 인식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주요하게 논의됐다. 지난 14일 공개된 5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근래에 국민연금과 개인을 중심으로 거주자 해외증권투자가 크게 늘면서 외환 유출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의사록에 따르면 이 위원은 “특히 국민연금의 경우 해외투자 비중을 계속 높이는 가운데 해외투자에 필요한 외화를 주로 현물환 매수로 조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처럼 해외증권투자로 인한 환율의 구조적인 절하 압력이 발생하고, 때에 따라 외환 유출과 환율절하 기대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초래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위원은 그러면서 그러면서 “최근 거주자 해외증권투자 규모가 경상수지 흑자 폭을 상회할 정도로 커지면서 외화자금 조달 규모가 확대되고, 그 결과 외채가 증가하고 있는데, 국민연금과 개인의 해외 증권투자 확대가 추세적인 흐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외환 수급 불균형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운데)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외환거래량 늘어나면 국민연금 등 교란요인 줄어들 것”

일각에선 이런 현상을 두고 조선업 호황기인 2006~2007년대를 함께 회자하기도 하는 분위기다. 당시에는 대규모 선박 수주가 반대로 원화 가치 급등(원·달러 환율 급락)을 부추겼는데,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이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조선업체 수주물량이 원화 강세를 부추겼다면, 국민연금 등의 해외투자는 원화 약세를 증폭시키는 교란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기재부 역시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방안을 찾는 데 고심하는 분위기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해외주식이나 해외채권의 비중을 늘리는 것에 대해서 이견을 내거나 개입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국민연금의 투자액이 우리나라 외환시장 규모에 비해 너무 큰 탓에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이 나타났을 때 통제가 전혀 이뤄질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전 국민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인 만큼 시장 영향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기재부에서는 외환거래량이 늘어나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반감될 수 있도록 시장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최근 기재부가 새정부 경제정책방향에서 외환시장 운영 시간을 새벽 2시까지 연장하는 등의 선진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우리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이 선진국지수(MSCI 및 WGBI)에 편입된다면,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