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장 불안이 커지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완만한 금리인상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달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하는 대신 0.25%p 인상하는 베이비스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연준이 속도조절에 나서면서 한국은행의 연내 추가 금리인상 횟수도 1~2회에 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 2일(현지시각) 미 의회에 나와 “3월 회의에서 0.25%p 금리인상을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파월 의장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앞두고 구체적인 금리인상폭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일(현지 시각)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그간 시장에서는 연준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 이달 15~16일 열리는 FOMC에서 기준금리를 0.5%p 인상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전쟁 충격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 둔화 압력이 커지자 연초 공격적인 긴축(돈 거두기)을 예고했던 연준도 전쟁의 파급력을 고려하면서 점진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파월 의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 경제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고 평가했다. 그는 “실제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숙고할 사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이번 사태로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한 국제유가가 120~150달러까지 올라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경우 미국 경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2차 협상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러시아가 공격 수위를 높인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예상보다 치열해지면서 전쟁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러시아는 지난 4일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했고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연안의 헤르손을 점령했다.

투자은행 바클레이스는 “이번 전쟁이 양방향 위험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연준이 점진적 금리인상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올해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물가 안정을 도모하려면 연준이 통화정책 정상화를 신중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동부 전선에서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대전차무기를 휴대한 채 이동하고 있다. 이날 우크라이나 협상 대표자는 비무장지대인 '인도주의적 통로' 설정을 위한 휴전 협상을 목표로 러시아로 향했다.

한국은행도 이런 흐름에 맞춰 금리인상 속도조절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달 중순까지만 해도 시장에서는 연말 기준금리가 연 1.75~2%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올해 우리나라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1%로 예상되는 만큼,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면 2~3회 추가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연 1.5%로 한 차례 올려도 긴축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시장의 연말 기준금리 1.75~2% 기대와 한국은행의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리스크로 주요국의 통화정책 기대감이 한 발 후퇴한 점을 반영해 우리나라의 연말 기준금리 전망도 기존 1.75~2%에서 1.5~1.75%로 낮추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인상이 1회에 그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기 시작했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올해 국내 통화정책 방향성에 대한 전망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연준의 연내 6차례 인상 기대가 5차례 정도로 낮아지면서 국내 기준금리도 2%보다 1.75%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안재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올해 한국은행이 제시한 3% 경제 성장 달성 여부가 추가 금리인상의 핵심 명분인 만큼, 상반기 견조한 수출과 소비 흐름의 전개 여부를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며 “다만 고물가 지속으로 인한 소비 회복 저해 우려와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 따른 경기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한은이 가파른 통화 긴축 경로를 선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했다.